詩다움

거미 여인 [신철규]

초록여신 2022. 9. 2. 22:57


거미 여인
신 철 규











앞치마를 두른 그녀는
도마 위에 물고기를 올리듯
책을 복사기 위에 놓는다
책날개가 퍼덕거린다
지그시 책을 밀착시키고 동작 버튼을 누른다
복사열에 미세하게 떠는 책장들
세게 누를수록 선명해지는 활자들
누군가의 생각과 땀이 남김없이 복사될 때
그녀는 벽면에 걸린 시계를 본다
그녀의 뒤로 책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다

복사기에서 새어나온 빛이 복사꽃처럼 흩어진다
검지에 낀 골무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가끔 그녀의 잘린 손가락이 복사되기도 했지만

손바닥에 복사기의 열이 스쳐간다
간지러우면서도 소름 끼치는 뜨거움
종아리에 돋아난 푸른 정맥
거미줄처럼 온몸을 휘감는다



_《심장보다 높이》(창비,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