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두메 양귀비 [신경림]

초록여신 2015. 1. 14. 10:24


두메 양귀비

  신 경 림














1

 날이 흐려 걱정했는데 지프차를 타고 천문봉에 이르니 발아래로 천지가 말갛게 온몸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때맞추어 구름 사이로 막 지던 해가 옷을 조금 열어 몸 한 부분을 살짝 보여주기도 한다. 저녁을 먹고 기상대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가 별을 보겠다고 나와보니 하늘은 두껍게 구름으로 덮였다. 아침에도 하늘은 잠깐 뜨는 해만 보여줬다가 완강하게 구름으로 몸을 덮는다. 해가 지고 뜨는 곳이 지척인 것이 놀랍다.



2

 서울서 장마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 떠났는데 이곳은 봄이 한창이다. 산록이 온통 연초록의 비단으로 덮였고 그 비단을 붉고 희고 노란 들꽃이 수놓았다. 그 갖가지 꽃들 중에서 나는 굳이 녹황색의 두메양귀비를 찾아본다. 백두산 밤하늘의 별들한테 듣지 못한 얘기들을 그것들이 대신 들려준다고 해서다. 갑자기 구름 사이로 쏟아진 햇살이 꽃밭을 훑고 간다. 뜰 수 없을 만큼 눈이 부시다.



3

 백두산을 내려와 연변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처녀 가이드는 외할머니가 고국을 떠나면서 외할아버지를 잃고 다른 외할아버지를 만나 정착한 사연을 옛말하듯 들려준다. 개방 후 외할머니가 옛 형제들을 만나는 재회와 갈등의 사연도 눈물겹다. 그녀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줄곧 두메양귀비를 생각했다. 어쩌면 그 꽃은 힘겹게 백두대간을 타고 올라와 이곳에 피면서, 늘 남쪽으로 머리를 두고 울고 있을 것 같았다.



4

 오락가락하던 비가 멎고 구름이 갈라지더니 동쪽 하늘에 쌍무지개가 떴다. 무지개는 산과 마을을 바꿔가면서 우리를 쫓아온다. 초승달도 구름으로 얼굴을 덮었다 벗었다를 되풀이한다. 별들이 다닥다닥 붙은 백두산의 하늘은 끝내 펼쳐지지 않고 대신 떴다 감았다 하는 눈앞에 수천수만송이의 녹황색 두메양귀비만 어른거린다.




*사진관집 이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