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꽃병의 연대기 [박서영]
초록여신
2014. 10. 17. 16:16
꽃병의 연대기
박 서 영
덩어리였을 땐, 그냥 덩어리였다
처음 만들어진 울음엔 흰 태지가 묻어 있었다
붉게 얼룩지고 온몸엔 주름이 많았다
사람들은 놀라운 눈으로 작고 보잘것없는
늙은이의 탄생을 지켜보았다
어머니의 몸을 빠져나온 게 아니라
어둡고 캄캄한 동굴로 다시 들어온 것 같았다
실수가 많았지만
언어와 울음은 전속력으로 발달했다
손가락과 발가락으로 사랑을 나눴다
언제쯤 자라 어른이 될까
밀고할 것을 찾아 개나리를, 목련나무를 뒤졌다
혀가 쿠키처럼 점점 딱딱해지고
아름답고 위험한 침묵이 자라기 시작했다
시력과 청력을 몸 안에 가두었다
간혹 소리 없이 울음이 쏟아져 장미나 백합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교태를 배운 적 없으나 갑자기 손과 발이
쑤욱 몸 밖으로 빠져나가 목을 조르곤 했다
어느 날 잠이 깊어졌을 때
누가 다가와 물을 갈아주고 새 꽃을 꽂아주었다
냄새가 나기 시작했을 때
드디어 후반부가 시작되었다고 웅성거렸다
바람이 뒤덮인 흙을 파헤쳐 발굴했다
사람들은 더럽고 깨진 채 발굴된 신생아에게
신분증을 만들어주느라 흥분하기 시작했다
ㅡ좋은 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