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용서 [김언]
초록여신
2014. 7. 12. 11:35
용서
김 언
인간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적으로 호소할 수 없다는 사실.
문장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다시 문장에 기대어 쓸 수도 없는 일.
저 두 문장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발걸음이 보인다면
남는 것은 빼는 일. 무엇을? 인간과 문장 사이에 있던 그 많은 말들을 빼는 일.
시를 빼는 일. 뺀 뒤에도 다시 남는 일.
방을 뺀 뒤에도 남아 있는 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다시 방이 되어가는 일. 사건. 장면. 또 무엇이 있을까?
인격 없는 방에서. 네 침대에서. 네 책상 위에서. 그럼에도 남아 있는
온갖 세간 도구들의 부재 속에서.그럼에도 남아 있는 네 인격만큼이나
너저분한 내 인격을 원망하거나 타박하지 않는 선에서
그럼에도 신격이 되지 않는 선에서
나는 방을 보고 있다. 방이 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아무한테도 용서를 구할 수 없지만, 아무도 없는 방에서 용서를 구하고 있다.
허겁지겁 그 말을 먹어치우고 있다. 뺀 뒤에도 남아 있는.
*모두가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