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2014 신춘문예 전북도민일보 시 당선작
2014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열화되다
이승은
나무들의 연대가 적요롭다
몸말아 등선이 고운 태아처럼
묵언수행을 선언한 지난 계절부터
딱 그만 크기의 추를 세우고 조그맣게 서 있다
저 추가 어떻게 뜨거움을 보여줄 것인가
작년 봄 2쪽 그즈음과 같은 모양새여서
땅이 열렸을 때부터 생긴 약속이라고
얼추 들은 터라
새로울 것도 없다고 생각이 넘나드는 순간
추가 넘어졌다
토해낸 숨결 안과 밖 경계선이 무너지고
추는 중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쓴다
매화꽃 일생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말도
화르르 소란스럽다
단 한 개의 귀를 지닌 추는 냉정을 잃고
물기에 젖어 파리한 소리는 적막을 뚫고
꽃 이파리 하나 열린다
열화되지 않은 꽃은 없으리
바닥 바닥으로만 음각했던 우리들의 희망이
달리 드러난 것이다
여러 번 꽁꽁 얼어 있던 약속이
심장 속 온도에 팔딱거리는작은 기립을 지지한다
쉿! 다음 쪽 봄꽃도 뜨거워지려 한다
당선소감
겨울임에도 다니고 있는 직장 본 건물 옆에 새로 건물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올라가는 건물 앞으로, 옆
으로, 일층에서 이층으로 무수하게 설치해 놓은 철구조물이 보입니다. 비계(scaffolding)입니다. 비계는
건설, 보수공사, 건물이나 기계를 청소할 때 작업인부와 자재를 들어 올리고 받쳐주기 위해 쓰며, 알맞
은 크기·길이의 발판재를 하나 또는 여러 개를 모양과 쓰임새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설치됩니다. 건물
이 완성되면 흔적 없이 사라져야하는 비계가 유독 눈에 들어봅니다. 안쓰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합니다.
볼품없는 나는 내 시를 위한 비계입니다. 세상을 보이게 하고 드러내는 뜨거운 노래를 부르면서 시를
남기고 비계처럼 사라지면 좋을 것이란 계획을 진즉에 세웠습니다. 나이 오십에 내 시를 세상에 나오게
해준 전북도민일보와 심사위원님께 깊이 감사를 드리며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 데 게으름을 피우지 않
겠다는 약속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심사평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생각의 재탄생’
신춘문예를 통해 이 땅의 시인으로 세상에 첫 선을 보이는 것은 눈부신 기쁨이다. 전국 각지에서 응모
한 137명의 시 569편을 심사했다.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섬세한 시각으로 바라보
고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것은 누에가 고치를 만드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토해 나오는 비단실을 보는 것
과 같다. 떨리는 가슴으로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어 시를 쓰고 응모한 예비 시인들의 문학을 향한 열
정에 큰 박수를 보낸다.당선작으로 이승은의 ‘열화되다’를 뽑았다. ‘나무들의 연대가 적요롭다/ 몸말아
등선이 고운 태아처럼/묵언수행을 선언한 지난 계절부터’라는 첫머리부터 시선을 끌었다. ‘토해낸 숨결
안과 밖 경계선이 무너지고/추는 중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쓴다’ 꽃이 열리는 순간의 경이로움을 호흡을
잠시 멈추고서 한 줄의 시로 완성한 모습이 시를 읽은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고 있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생각이 언어를 통해 재탄생하는 모습이 반갑다. 앞으로 좋은 시인으로 성장할 것으로 믿는다.구
민숙의 ‘뒤란’은 오래 들고 있었던 작품이다. 바람처럼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이야기들이 떠오르는 영
상과도 같았다. 생각의 깊이를 더하여 시의 언어를 조율한다면 머지않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
한다. 최윤정의 ‘풍화’, 김완수의 ‘독방일기’, 김종득의 ‘돌아온 만경들’ 역시 좋은 작품이었다. 아깝게 낙
선한 분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조미애 <국제펜클럽한국본부 및 한국문인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