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웃는 새 [김충규]
초록여신
2013. 9. 24. 07:20
웃는 새
김 충 규
엑스레이 촬영을 끝내고 온 새가
늑막 아래 핏덩이가 뭉쳐 있는 새가
입술을 다쳐 조잘거릴 수 없는 새가
실없이 웃는다 나뭇가지가 부르르 떨릴 만큼
지난밤 태풍에 맞서느라 지칠 대로 지친 나무 속에 숨어
웃는다 새는 죄(罪)가 없어 웃음이 투명하다 웃음의 뼈가 다 드러난다
엑스레이 사진에 뭉쳐 있는 건 핏덩이가 아닌 웃음 덩어리일지도 모른다
웃어야만 새는 숨을 더 이어갈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는지 모른다
지상에 바퀴 달린 것들이 질주할 때 새는 속도를 잠시 내려놓고
실없이 웃는다 아기같이 까르르 웃는다
생전에 제대로 웃어보지 못하고 죽은 자의 영혼이
새의 육신으로 와서
이승의 오후를 소박하게 느끼는 듯이
새가,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새가, 웃는다 새다운 오후다
*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