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그렇지만 고래는 울지 않았다고 한다 [김충규]

초록여신 2013. 9. 2. 15:03

그렇지만 고래는 울지 않았다고 한다

 김 충 규

 

 

 

 

 

 

 

 

 

그렇지만 고래는 울지 않았다고 한다

뭍에 올라온 고래의 울음소리를 듣기 위하여 우르르 미친자들이 구름같이 해변에 몰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고래는 클, 클, 숨소리도 거칠게 내지 않았다고 한다 아주 조용했다고 한다

고래의 이마에 작살이 꽂혔던 자국이 있다고 누가 말했으나 고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눈빛으로

사람들을 제 눈망울에 천천히 다 담았다고 한다

걱정마, 내가 일어나면 당신들 다 내 배 속에 품어 멀고 아득한 해저로 데리고 갈게 하는 듯이……

그렇지만 고래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고래 쪽으로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어떤 사람을 꼬리로 탁, 쳤다고 한다

그 탁, 소리가 둔탁하게 들린 게 아니라 마치 피아노 건반 '레'를 누른 것같이 짧지만 정교한 음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고래는 울음을 내지르기 직전의 표정을 짓지 않았다고 한다

실망한 사람들이 하나둘 해변을 벗어날 때 고래는 그 자리에서 제 몸을 무덤의 봉분같이 여긴 듯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아직 실망하지 않은 사람들이 단체로 고래를 바닷속으로 밀어넣기 위하여 으쌰 으쌰 힘을 쓸 때

고래의 피부는 느리게 실룩거렸다고 한다 괜찮아, 난 괜찮아, 어느 통치자의 마지막 말같이……

고래는 꼬리를 천천히 움직여 해변에 무슨 글자인지를 썼다고 한다

고래의 문자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그게 고래의 유서인지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저 으쌰 으쌰 무식하게 힘을 쓰며 고래를 바닷속으로 밀어넣기 위하여 땀을 흘렸다고 한다

유독 한 사람만이 고래가 쓴 글자가 산(山)이라며 고래를 산으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다수에 의해 묵살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밀었으나 고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