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한밤에 우리가 외 5편[이근화] ㅡ2013 제58회 現代文學賞 수상작

초록여신 2012. 12. 28. 12:22

한밤에 우리가

 이 근 화

 

 

 

한밤에 치킨버스*를 타고 우리가 간다면

보이지 않는 산

흐르지 않는 강

다가올 여름을 위해 아껴둔 풍경들

 

 

불편한 식사를 거절하고

약속을 만들지 않고

형광등 불빛 아래 빛나는 초콜릿 바를 깨문다

끈적한 입속에 가지런한 이들이

다가올 여름을 위해 제대로 썩어간다

 

 

퇴근길에 아이들을 번쩍 들어 올리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우리의 유전자가 냇물같이 흘러서 어디에 이를지 고민하다가

발이 세 개인 수레가 남기는 긴 흔적을 따라가본다

 

 

뜨거운 심장을 갖게 해줄 신비의 명약과 어려운 주문이

아이들의 입속에서 예고 없이 흐르겠지

아이들의 턱밑에 조그맣게 집을 짓고 산다면

다가올 여름을 위해 나의 사람과 너의 사람을 준비하고

 

 

한밤에 치킨버스를 타고 우리가 간다면

보이지 않는 산

흐르지 않는 강

다가올 여름을 위해 아껴둔 풍경들

 

*치킨버스:중남비의 장거리 운행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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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소리의 크기를 표시하는 단위를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어

세탁기 소리는 청소기 소리보다 다정하고

재채기 소리는 코 고는 소리보다 우습고

가위질 소리는 물 끓는 소리보다 단정한 것 같아

 

 

연못의 고요는 허구야 물고기들이 떼로 트림을 하고

야구장의 함성은 언제나 침묵과 고요의 시간 뒤에 오고

머리카락이 싹둑 잘려나갔다가 아무것도 반성하지 않았다

희고 딱딱한 귀가 오늘은 파도 소리를 담으러 바다로 간다

 

 

한 달 전에도 일 년 전에도 내 귀는 거기 달려 있었는데

십 원짜리 동전처럼 쓸모없이 생각되었는데

머릿속에서 귀는 언제나 찌그러져 있고

남의 뒤통수는 늘 시원하게 보인다

 

 

파도는 시원할까 날마다 조금씩 뜨거워질까

추억을 녹이며 죽어가는 노인들의 미지근한 백발이여

평범한 소리를 담기 위해 지불해야 할 것이 많은 것 같아

나는 매일 밤 잠이 들고 말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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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이 손 좀 놔주세요

 

 

호박죽 포장을 들고 있었다

오토바이가 쓰러졌고 한참을 미끄러져 나갔다

쿵 소리가 먼저였던가

 

 

계산하던 아줌마가 영수증을 건네주다 놀라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아이고 어떡해 어떡하지 어떡하나

헬멧을 벗은 사람은 초로의 남자였다

오토바이 밑에 깔린 다리를 빼지 못했다

 

 

설탕 트럭을 피하려다가 속도를 줄이지 못한 걸까

트럭 운전수가 오토바이를 들어 올렸다

사람들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경찰서인지 병원인지 모를 곳으로 손가락을 놀렸다

 

 

호박죽은 식어가는데

죽집 아줌마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가야 하는데

혈압이 오르락내리락 엄마한테 가야 하는데

 

 

얼마나 다쳤는지 보험을 들어놨는지

걱정은 누구의 몫일까

영원히 일어서지 못하면 어떡해

설탕 트럭이 걱정을 우수수 쏟아냈다

 

 

아줌마 제발 이 손 좀 놔주세요, 말하지 못했다

죽은 식어가는데 엄마가 오르락내리락 기다리는데

남자의 죽은 누가 포장해 갈지

빚쟁이 딸이 있으면 어떡해

달콤하지 않은 걱정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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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팔러 간 이야기

 

 

내게도 금은 있다

동전보다 빛나고 지폐보다 무거운 금이 있다

서랍에 처박혀 무거운 목소리를 내는 금이 있다

금값이 치솟고 고가매입 전단지와 안내판이 걸리니

공연히 그걸 꺼내보았다

집안 경제도 못 챙기는 나는

유럽 경제나 미국 증시 같은 건 알 수 없다

동네 금방 아저씨 얼굴도 가물가물

가물치처럼 길쭉하고 기름졌던가

쌀을 안치기도 귀찮은 날

동네 칼국숫집에 들렀다가 가물치와 마주쳤다

이십이만 오천 원

한때는 이십오만 원까지 쳐줬단다

미끈한 정보 사이로 그의 눈빛이 빛났던가

나의 눈빛이 가물치처럼 찢어졌던가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 설렁설렁 살고 싶은데

여행을 갈까 적금을 들까 코트를 살까

비스듬히 내리는 비가 오늘 내 서럽을 적신다

칼국수 속 드문드문 박힌 조개고

아까 잠깐 웃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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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록

 

 

너의 이불은 거기에 구겨져 있다

우편물이 쌓이고

오래된 것일수록 반갑겠지

새로운 먼지가 차곡차곡

꼭 다문 입술이 할 말이 많아 보인다

너는 거기 없는데

 

 

둘둘 말린 줄넘기는 파란색 검은색 얼룩무늬

땅바닥을 치고 구름을 치고

쿵쿵거린다

나와 함께 뛰어볼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서야지

그런데 무릎이 투명해지고

시냇물 소리는 점점 커진다

너의 눈이 번쩍 떠진다

 

 

이별은 언제나 축제와 같지

취해서 아무렇게나 소리를 지르고

매운 안주를 먹고

엉덩이를 흔들었는데

이상하지가 않다

가로등은 커다란 눈이 되어간다

눈물이 없는 눈

깜박거리며 어제를 잊었는데 말이야

 

 

손가락이 기억하는 숫자

입술이 기억하는 숫자

눈이 기억하는 숫자

이사 갈 줄 모르는  노인네들의 희한한 냄새

초여름 죽어가는 병자들의 신음 소리

차도와 인도를 가르기 위해 오늘도 가로수들

긴 호흡을 내뱁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인데

시곗바늘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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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

 

 

얼마나 많은 콩나물이 저녁의 식탁에 오를까

우리가 죽어가는 날까지 딱딱 이를 부딪치며

씹어야 할 것들이 자라고 매일 발걸음을 딛는다

우리가 본 것들은 순서대로 하나씩 사라지겠지

 

 

슬랙스틱에 대한 우리의 기호 때문일 거야

고춧가루를 넣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망설였던가

한 사람이 쓰러지고 두 사람이 쓰러지고

폭소와 폭소 사이에 밥알이 흩어진다

 

 

구르고 짓이겨지고 들러붙는다

손끝에 화장지에 엉긴 웃음은 다 소화되지 않는다

오늘 저녁 식탁에서 미끄러져 영원히 죽고 싶다는 듯

한 사람이 쓰러지고 두 사람이 쓰러지고

 

 

콩나물은 길고 가늘고 노랗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억지로 입은 속옷이나 엉성하게 붙인 콧수염처럼 어색하고

어색해서 이제 곧 찢어지거나 떨어질 것들이 있다

꼭꼭 씹어 삼키지 않아도 쉽게 넘어가는 것들이 있다

 

 

 

*2013 제58회 現代文學賞 수상시집, 현대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