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12시에 이별하다 [김선재]

초록여신 2012. 8. 18. 12:18

 

12시에 이별하다

김 선 재

 

 

 

 

 

 

 

 

 

 꼼짝도 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마라

 보이지 않으면 믿을 수 없으니

 둘이 아닌 하나, 하나가 아닌 둘 사이

 담장 안의 너와 담장 밖의 나

 보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걸

 

 

 우리는 정오를 발밑에 숨긴다 여기는 말이 자라는 시간, 혀가 길어지는 시간 둘이 아닌 하나와 하나가 아닌 둘 사이 둘이 되지 않는 하나를 위해 하나가 되지 않는 둘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마라

 지금은 결정의 순간

 이 숲은 왼쪽에서 시작해 오른쪽에서 끝나는 곳

 너무 많은 오해를 행간에 숨긴 곳

 

 

 숲의 심장으로 뛰어들 때마다

 꿈은 화해할 수 없는 손목들을 자르고

 입을 열 때마다 질서의 습관과, 습관의 질서가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내 발이 멀리 걸어간 날이면, 그래서 내 발목을 자르고 싶은 날이면, 나는 애초부터 필사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 여기는 왼쪽에서 시작해 오른쪽에서 끝나는 숲, 이 숲이 가진 결별의 온도를 기록할 수 없다

 

 

 자정은 흔적을 지우는 시간

 기도도 없는 자행(字行)을 지울 시간

 

 

 꼼짝할 수 없이 내 옆에 누운 너는

 멀리 걸어간 발자국인가

 조금 전 삭제한 문장인가 구덩이를 파고

 

 

 스스로를 묻는 나인가

 스스로에게 묻는 나인가

 

 

* 얼룩의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