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홍옥마을 [최문자]

초록여신 2012. 5. 21. 15:49

 

홍옥마을

최 문 자

 

 

 

 

 

 

 

 

 

 사과를 깜빡깜빡 잊어버리며 홍옥마을에 살고 있다

 

 

 긴 멀미처럼 지구는 수억 년 된 홍옥 나무들이 무더기 무더기 자라는 사과로 가득 찬 마을

 

 

 바람은 오늘도 모든 잡풀들을 용서하러 가고 멘델스존의 핑갈 동굴 앞에 서곡처럼 사과들이 매달려 있다

 

 

 이 나무의 슬픔은 태초의 사과로부터 온 것 그 나무로부터 먹은 슬픔도 사과 모양 자기가 자기 죄에 바르면 더 붉어지는 사과는 오래된 허구의 치료 약

 

 

 홍옥마을 뒷마당, 붉은 책이 되어 이브는 벌써 지구에 돌아와 있다 다음 날도 그다음날도 여전히 사과의 페이지를 열고 어둠을 흉내 내고 있다

 

 

 한 개의 사과에도

 사과를 달지 않으려고 사지를 버둥거리던 무한의 허공이 있다 사과 바깥으로 뛰쳐나가려던 북서풍도 있다

 

 

 사과의 붉은 벽돌은 자주 무저진다 부서지는 나의 얼굴 나의 어깨 나의 떨림

 

 

 가냘프고 무거운 저것들 동그라미 지구, 오늘도 그 많은 사과의 부화를 위해 깜깜한 알을 품고 저 혼자 돈다

 

 

* 사과 사이사이 새 / 민음사, 2012. 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