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저녁의 눈 [박형준]

초록여신 2012. 2. 4. 22:15

 

저녁의 눈

 박 형 준

 

 

 

 

 

 

 

 

 

어디로도 갈 수 있고

어디로도 갈 수 없는 길,

저녁의 눈 위에서 경련을 하며

죽어가는 새를 보았지

 

 

저녁이 되면, 익숙한 비밀들로 꽉 찬 방에서

혼자 서성이다가

먼 곳의 마지막 집처럼 방금 나온 집을 바라보았지

 

 

그렇게 집에서 몇 걸음 떼지도 않은

겨울 저녁 길,

쏟아지는 눈발이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발자국도 보이지 않는 길,

 

 

저녁의 눈 위에서

죽어가는 새가 경련을 하며

날아가는 시늉을 하고 있었지

윰직이지도 못하면서

눈을 얼마나 움켜잡았는지

 

 

다리 전체가 의지가 된 새는

더운 김을 올리고 있는 모퉁이는

바람이 불 때마다

은빛으로 멍 들고 있었지

 

 

시작도 못 한

이 짧은 저녁 산책 길에서 난

새의 지나온 시간을 본 것인지

저녁의 눈이 어디로 다 가는지

 

 

방금 나온 집을 뒤돌아보자

휘파람을 불며 바람에 떨리는

먼 유리창,

소중하지만 이제 감출 것도 없는 비밀들

저녁 어스름 속에서 떠다니고 있다

 

 

*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문학과 지성사(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