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일과 [최금진]
오늘의 일과
최 금 진
잠을 깨기도 전에 후박나무 이파리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오늘은 빌려준 돈을 받으러 어딜 다녀와야 하고
나보다 훨씬 더 행복한 사람에게 그간 연락 못 드렸다고 잘못을 빌어야 한다
나에겐 용서받을 권리가 없다
이사를 하면 저놈의 불면증을 싹둑 잘라버려야지
나는 후박나무의 고민이 만드는 그늘 아래 누워 있다가 외출을 하고
돌아와서는 억지로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
작년과는 전혀 다르게 살고 싶었지만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여지없이 젤리처럼 말랑말랑한 두통과 악몽이
뒤통수에 달라붙어 있고
오늘은 더 좋은 일자리를 위해 나의 결격사유를 고민해야 한다
저를 받아주세요, 저를 당신의 수족으로 삼아주세요
세상엔 이런 자질구레한 소원을 근엄하게 거절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모두 망가진 하모니카처럼 빽빽거리며 함부로 과거를 연주한다
내 몸을 숙주 삼아 분노와 질투를 먹고 사는 이 후박나무는 암컷이며
돈을 빌려간 사람이 끝내 안 갚는다면 나는 이번엔 단단히 혼을 내줄 것이다
감옥에 갈 수도 있다고 다짐한다
내가 무섭다고 중얼거리는 어머니는 나보다 돈을 더 무서워한다
오늘은 이삿짐쎈터에 전화를 걸어야 하고
밀린 공과금을 내야 하고, 훔칠 수 있다면 보석 같은 별들을 훔쳐야 하고
지난겨울엔 운이 나빴습니다, 밭에서 겨울 까마귀를 자주 보았거든요
손해를 안 보기 위해선 보다 더 뻔뻔해져야 하고
후박나무의 들숨 날숨 속에 숨어 건너오는 집주인은 밀린 집세를 감시하고
어머니는 또 동네 구멍가게에서 눈치를 보며 나를 지불해야 한다
그래도 감사한 건 신께서 나를 방관한다는 것, 용서를 빌 일이 많지만
공짜로 얻는 건 왠지 죄짓는 것 같아서 이젠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이놈의 후박나무는 이사하면 당장 뽑아버려야지, 그러나
각오와 결심이 무성한 건 영양결핍 때문이란 걸 후박나무는 알고 있다
위장병에 좋다니까 차가운 느릅나무 물을 냉장고에서 꺼내 마신다
쓰리다, 나를 무시하면 그 어떤 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천원짜리 지폐 몇장 들고 서 있는 후박나무의 빈 지갑을 모르는 척하고
나는 오늘도 사람들이 나무숲처럼 만들어낸 빽빽한 웃음의
그 컴컴한 터널 속을 걸어가야 한다
* 황금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