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본의 아니게 [박세현]

초록여신 2011. 12. 5. 10:08

 

 

 

 

 

 

 

 

 

 

 

망상 해변이 늦된 철학개론서의 번안 같았습니다

아무도 못 보는 사이

잔파도 몇 소소롭게 부서지는 거 보았습니다

-나, 무사합니까?

-그 연세에 무사해서 뭣 혀?

수평선 흐트러질까 봐 조심히 떠 있는

화물선 한 척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몸 가누듯이

겨우 정신 붙들고 내 곁으로 오는 거

생각 없이 그냥 보게 됩니다 배는

내 배에다 짐 부려놓고 등 뒤로 흘러갔을 겁니다

망상 해변에 서서 이 모든 상황 속에

본의 아니게 나를 꾸역꾸역 집어넣었습니다

이 시는 그 상황에 담기지 못하고

뭉개져 흘러나온 물건일 뿐입니다

본의 아니게 그날 빗방울도 몇 점 떨어졌습니다

 

 

 

* 본의 아니게 / 문학의 전당, 2011. 10.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