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바이올린 켜는 여자 [도종환]

초록여신 2011. 8. 18. 06:49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살고 싶다

자꾸만 거창해지는 쪽으로

끌려가는 생을 때려엎어

한 손에 들 수 있는 작고 단출한 짐 꾸려

그 여자 얇은 아래턱과 어깨 사이에

쏙 들어가는 악기가 되고 싶다

왼팔로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워진

내 몸의 현들을 그녀가 천천히 긋고 가

노래 한 곡 될 수 있다면

내 나머지 생은 여기서 접고 싶다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연애하고 싶다

그녀의 활에 내 갈비뼈를 맡기고 싶다

내 나머지 생이

가슴 저미는 노래 한 곡으로 남을 수 있다면

내 생이 여기서 거덜나도 좋겠다

바이올린 소리의 발밑에

동전바구니로 있어도 좋겠다

거기 던져주고 간 몇닢의 지폐를 들고

뜨끈한 국물이 안경알을 뿌옇게 가리는

포장마차에 들러 후후 불어

밤의 온기를 나누어 마신 뒤

팔짱을 끼고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싶다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살 수 있다면

 

 

 

 

*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