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행성 [조용미]
기억이라는 혹은 추억이라는 이름의 그 대리석 같고 절벽 같은 견고함을 아시는지요 기억은 금강석처럼 단단합니다 견고한 모든 것은 댁 속에 녹아 사라지고 신성한 모든 것은 모욕당한다 했던가요 기억은 물이 되어 호수가 되고 바다가 되고 우리가 양육해온 모든 별들은 결국 부수어지고 말겠지요
기억은 지구 반 넘어 채우고 있습니다 지구는 기억의 출렁이는 파란 별, 지구는 기억이 파도치는 행성, 지구의 정체는 바로 인간의 기억입니다 빙산이 녹아 해마다 기억의 수위가 높아집니다 기억이 뛰어오르거나 넘쳐나는 것을 막기 위해 강에는 얼음이 덮이지요
수증기가 끊임없이 대기권 밖으로 빠져나가도 지구의 기억이 줄어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다나 육지에서 증발한 기억은 구름이 되고 비와 눈이 되어 내리고 또 구름이 되고 바다로 가 다시 빗물이 되어 지상으로 스며듭니다 얼마나 많은 기억들이 대기 중에 흐르고 있는지요
기억은 영상 4도에서 가장 무겁기 때문에 한겨울에 온갖 기억의 파편들이 굳어버리지 않고 얼음장 밑에서 헤엄쳐 다니며 살 수 있습니다 기억은 지구에서 가장 풍부한 자원입니다 그러므로 지구를 기억의 행성이라 부르지요
그러나 지구 전체의 기억은 많지만 우리가 쓸 수 있는 기억은 극히 적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기억의 행성 지구는 사실 기억이 얼마 남지 않았지요 그 견고한 기억도 대기 속에 사라지고 신성한 지구만 우주의 기억 속에 남게 될 날도 머지않았습니다 지구는 결국 변형된 기억으로 남게 된다는 것을 어쩌면 우리는 아주 모르고 싶은지요
* 기억의 행성 / 문학과 지성사, 2011. 7. 26.
매화의 향기는 천 리까지 퍼진다 했던가. 해마다 이른 봄이면 매화 피기 전에 몸이 먼저 아파오고 그러면 매화 필 때가 되었음을 안 지가 오래되었다. 섣달에 피는 매화를 奇友라고 하고 봄에 피는 매화를 古友라 하는데 그 나름의 격이 있겠으나 기우는 귀하고 서늘하고 엄정하고, 고우는 애틋하고 상서롭고 염결하다.
전기의 매화초옥도 앞에 홀린 듯 서 있었던 적이 많았다. 도록으로 수없이 보았지만 그해 봄 실견한 매화초옥도는 왜 그렇게 달랐던 것일까. 요절한 탓에 많지 않은 고람의 다른 그림을 나는 더 편애하지만 매화초옥도 앞에서는 속수무책 오직 매화초옥도를 그린 고람만이 있을 뿐이다.
매화초옥도를 보고 있으면 깊은 산속에 홀로 거하는 벗을 찾아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아니, 멀리서 지음이 찾아올 듯하여 찻물을 올려놓고 그를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차가운 공기가 숨으로 들어차는 듯하지만 그윽한 향기와 따스한 온기가 전해진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이른 봄바람을 헤치고 탐매행에 나섰다 돌아온 날, 매화초옥도를 펼쳐놓고 앉아 있는 봄밤은 적요하고 깊고 아프다. 하지만 느낄 수 있지 않은가. 홍의를 입은 사내. 봄꽃처럼 빼어나고 성품은 가을 국화처럼 맑았으며 나이 서른에 얻은 것은 오백 년을 당해낸대고 남은 이들이 애석해했던 그 사내가 매화초옥도를 통해 내게 전해주는 서늘한 온기를.
ㅡ시집 뒤표지글, <시인의 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