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해줘, 구름아 [박정대]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신다, 담배를 피운다, 삶이라는 직업
커피나무가 자라고 담배 연기가 퍼지고 수염이 자란다, 흘러가는 구름 나는 그대의 숨결을 채집해 공책 갈피에 넣어둔다, 삶이라는 직업
이렇게 피가 순해진 날이면 바르셀로나로 가고 싶어, 바로셀로나의 공기 속에는 소량의 헤로인이 포함되어 있다는데, 그걸 마시면 나는 7분 6초의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삶이라는 직업
약속해줘 부주키 연주자여, 내가 지중해의 푸른 물결로 출렁일 때까지, 약속해줘 레베티카 가수여, 내가 커피를 마시고 담배 한 대를 맛있게 피우고 한 장의 구름으로 저 허공에 가볍게 흐를 때까지는 내 삶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내가 어떡하든 삶이라는 작업을 마무리할 때까지 내 삶의 유리창을 떼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구름아, 그대 심장에서 흘러나온 구름들 아, 밤새도록 태풍에 펄럭이는 하늘의 커튼아
* 삶이라는 직업 / 문학과 지성사, 2011. 5. 30.
삶이라는 직업은 센티멘털하다
나는 애정 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만 사방에 편재한 사랑을 볼 때마다 갸륵한 인류애에 사로잡힌다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는 함께 잠들 수는 있지만 아침이면 에메랄드는 에메랄드로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로 깨어나야 한다'는 애정 공산주의의 수칙에 공감하면서도 거기에서 더 나아가 콜로이드 소노르Colloides Sonores, 즉 교착적 음향의 사랑을 꿈꾸는 나는 어쩌면 애정 라이프니츠주의자에 가깝다
他者에 대한 영원한 동경 때문에 나는 삶이라는 직업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고독과 분별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
*
오지의 행성에서 오지 않는 신비를 기다리는 늑대 사냥꾼처럼 나는 푸른 눈동자를 가진 한 마리 시를 기다리며 밤과 새벽의 영토를 기꺼이 고독과 침묵에게 내어줄 것이다
밤새 함박눈이 쏟아지려나 보다
영혼의 동지들이여 단결하자(어떻게? 아무튼!)
창가에 올려놓은 맨발의 반가사유상, 체 게바라 라이터, 담배 한 대, 고독은 실제적인 것이다
ㅡ시집 뒷면 표지글, <시인의 산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