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라일락이 피는 계절 [박정대]

초록여신 2011. 6. 11. 08:32

 

 

 

 

 

 

 

 

 라일락이 필 때 나는 꽃 피는 봄에 당도해 있었고 라일락이 필 때 너는 가을로 갔다

 

 

 라일락이 필 때 죽어간 고양이들을 추억하며 나는 새순이 돋는 삼나무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지

 

 

 라일락이 필 때 가려운 계절의 겨드랑이 사이로는 한 무리의 호랑이들이 왔지만 삼나무 옆에는 자작나무가 있어 푸른 침묵의 새잎을 보여주었지

 

 

 라일락이 필 때 나는 라일락과 함께 피어나지 못하고 라일락이 필 때 너는 라일락과 함께 허공의 향기로 번지지 못했지

 

 

 라일락이 필 때 나는 러시아로 가고 라일락이 필 때 너는 가을로 갔지

 

 

 라일락이 필 때 너는 사라진 한 편의 시 라일락이 필 때 나는 다시 돌아온 노래

 

 

 라일락이 필 때 죽어간 고양이들을 추억하며 나는 새순이 돋는 삼나무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지

 

 

 라일락이 필 때 담배공장에서는 카르멘이 여전히 담배를 만들고 있었고 라일락이 필 때 필터 없는 담배를 뜨겁게 통과한 연기들은 너의 혀를 달콤하게 물들이고 있었지

 

 

 입술의 산맥을 지나온 담배연기의 구름들 입술을 통과한 딱딱한 자작나무의 수액들

 

 

 라일락이 필 때 나는 밤새 계곡물에 얼굴을 씻고 라일락이 필 때 너는 밤새도록 말을 타고 내게로 달려왔지

 

 

 라일락이 필 때 라일락들은 서둘러 떨어질 시간들을 예약해두었지만 라일락이 필 때 식당을 예약하지 못한 우리는 파리의 뒷골목을 헤매고 있었지

 

 

 라일락이 필 때 저녁은 한 편의 영화 라일락이 필 때 저녁은 몇 잔의 술

 

 

 라일락이 필 때 저녁은 테이블 위에 놓인 담배연기 라일락이 필 때 저녁은 유리창에서 피어나는 어둠과 불꽃의 키스

 

 

 라일락이 필 때 저녁은 침대 위의 음악 라일락이 필 때 저녁은 정원의 꽃을 흔드는 바람

 

 

 라일락이 필 때 너는 리스본 천사 라일락이 필 때 나는 딩뱃 고원의 사제

 

 

 라일락이 필 때 너는 대서양 주점의 웨이트리스 라일락이 필 때 나는 울지 않는 갈매기

 

 

 라일락이 필 때 죽어간 고양이들을 추억하며 나는 새순이 돋는 삼나무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지

 

 

 라일락이 필 때 삼나무 옆에는 자작나무가 있어 라일락이 필 때 나는 자작나무 옆에서 밤새도록 자작자작 술잔을 기울였지

 

 

 라일락이 필 때 너는 나의 기타 까마리 공작 라일락이 필 때 나는 아무도 듣지 않는 음악

 

 

 라일락이 필 때 너는 종이 위에 그려진 영혼의 국경선 라일락이 필 때 나는 에델바이스 천막에서 하룻밤을 묵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가는 바람의 국경수비대

 

 

 라일락이 필 때 너는 사라진 라일라 라일락이 필 때 나는 돌아온 리 마빈의 아들들 인터내셔널

 

 

 라일락이 필 때 너는 그렇게 러시아로 가고 라일락이 필 때 나는 그렇게 웃으며 가을에 당도했다

 

 

 

* 모든 가능성의 거리 / 문예중앙시선, 2011. 5.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