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액션페인팅 [김지유]

초록여신 2011. 5. 3. 22:24

 

 

 

 

 

 

 

 

  술 취한 사내가 잠든 새벽, 여자가 벽을 닦는다

 

 

  벽엔 간밤의 핏자국이 묻어 있다 닦아내면 닦아낼수록 사방으로 크게 번져 황홀하게 잘 마르는 피 여자의 몸에 가시덩굴이 번져가듯 또다시 거친 문신을 새기던 사내의 눈동자엔 초점이 없다 부서진 우산살이 살아 움직이는 손가락들처럼 여자의 등짝을 움켜쥐고 있다 담뱃불에 덴 허벅지가 소용돌이 모양으로 부풀어 오른다

 

 

   오래 전부터 여자의 몸은 봉방(蜂房)이다 그 구멍마다 꿀처럼 감춰진 교성을 흡혈하듯 즐기는 사내가 취해 돌아오는 밤이면, 여자는 지레 놀라 본능적으로 옷을 벗는다 사내가 휘두른 허리띠가 뱀처럼 더 깊고 집요하게 살과 뼈 속으로 파고든다

   벽에 물걸레를 대자 굳은 피딱지가 금세 녹아내리며 수채화처럼 번진다 온몸이 매질로 액션페이팅된 여자가 소리죽여 울며 벽을 연신 닦아 내린다 점점 크게 핏물이 배어가는 벽을 바라보며 여자는 습관처럼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중얼거린다

 

 

   사내가 뒤척이며 물을 찾는 새벽, 검은 타액으로 범벅된 알몸의 여자가 여전히 붉은 벽을 닦고 있다

 

 

* 액션페인팅, 천년의 시작(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