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메롱메롱 은주 [김점용]

초록여신 2010. 10. 24. 19:13

 

 

 

 

 

 

 

 

 

 

 깊은 산 등산로 한가운데 서서 사람들 손잡아주느라 닳고 닳은 나무줄기의 반질반질한 맨살에 새겨진 글자 은주

 

 

 나는 그것이 남몰래 사랑하는 한 여인의 이름인지 이파리를 죄다 몸속으로 숨긴 그 나무의 이름인지 파란만장 푸른 잎물결 속에 빈 배의 이름인지 알 수가 없어 한참 동안 나무 주위를 맴돌다 돌아왔는데

 

 

 아무래도 그 나무는 어떤 사람과 눈이 맞아 죽어서 올라가든가 내려가든가 하는 중인 것 같은데 거기에 소 한 마리 매어서 딸려 보낸 주인이 누군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

 

 

 한밤에 부엌 냉장고 돌아가는 소릴 들으며 이런저런 잡생각을 깔고 앉을 때나 강원도 깊은 산골에 두꺼운 방석을 펴면 이따금 귓전에 울리는 소 방울 소리가 메롱메롱 은주, 하고 날 놀리는 것 같아 평생을 그렇게 놀림받으며 살 것만 같아

 

 

 

 

 시인 김점용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997년 『문학과 사회』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오늘 밤 잠들 곳 마땅찮다』가 있다.

 

 

 

* 메롱메롱 은주 / 문학과 지성사, 2010. 10.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