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의 문장 [손택수]
아내야, 거기선 지구를 몇 바퀴 돌아온 먼지 한 점도 여행자의 어깨에 내려 반짝일 줄 안단다. 설산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은 몇천 년전 우리 몸속에 있던 울음소리를 닮았지. 네가 아플 때 나는 네팔 어디 설산에 산다는 독수리들을 생각했다. 한평생 얼음과 바위틈을 헤집고 다니던 부리가 마모되면서 더는 사냥을 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굶어 죽어가는 독수리들. 그러나, 힘없이 굶어 죽어가는 독수리떼 사이에서 어느 누군가는 마지막 힘을 다해 설산의 바위를 찾아 날아오르지. 은빛으로 빛나는 바위 벽을 향해 날아가 자신의 부리를 부딪쳐 산산이 으깨어버리기 위함이라는데, 자신의 몸을 바위 벽을 향해 내던질 때의 고통을 누가 알겠니. 빙벽 앞에서 질끈 눈을 감는 독수리의 두려운 날갯짓과 거친 심장박동 소리를 또 누가 알겠니. 부리를 부숴버린 독수리의 무모함을 비웃듯 바람 소리가 계곡을 할퀴며 지나가는 히말라야. 주린 배를 쥐고 묵묵히 바위를 타고 넘는 짐승의 다친 부리를 너는 알지. 발가락 오그라드는 뿌리들 뻗쳐오른 뿔 끝에 반짝이는 빛을 알지. 머잖아 쓸모없어진 부리를 탓하며 굶어 죽는 대신 스스로 부리를 부숴버린 독수리는 다시 새 부리를 얻는다. 으깨진 자리에서 돋아나는 새 부리만큼의 목숨을 얻는다. 대대로 숨어 유전하는 설화처럼 몇억 광년을 걸어 내게로 온 아내야, 우리가 놓친 이름들을 헤며 아플 때 네 펄펄 끓는 몸으로 지피는 탄불이 오늘도 공을 치고 돌아온 내 곱은 손을 녹여줄 때 나는 생각했다, 네팔 어디 혹한에 벼린 부리처럼 하늘을 파고든 채 빛나는 설산을.
*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시 2010, 현대문학(2010. 7.)
아내는 지금 아프고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할 말이 있다. 히말라야 설산에 사는 독수리 이야기를 해줄까. 두 종류의 독수리가 있지. 평생 설산을 헤집으며 살다가 부리가 마모된 독수리는 쓸모없어진 제 부리를 탓하며 굶어 죽는다. 그러나 어떤 독수리는 바위에 제 부리를 부딪쳐 박살내고 다시 새 부리를 얻는다. 아내야, 이곳은 히말라야 설산이고 우리는 독수리일지도 모른다. 살아서 굶어 죽거나 죽어서 다시 살거나 할 일이다. 우리는 어느 길을 택해야 하느냐.
단단한 이미지와 투명한 전언이 결합돼 있다. 단단하고 투명하다는 느낌, 그건 바로 얼음의 속성이다. 그러니 '얼음의 문장'이라는 제목이 정확하게 어울린다. 하나 더. 얼음은 녹으면 물이 된다. 달리 말하면, 얼음은 미래의 물을 제 안에 품고 있다. 이 시도 물기를, 그러니까 어떤 정서를 머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머금어진 채로 두어야지, 그것을 '삶과 아내에 대한 사랑' 운운하는 식으로 옮겨 적는 일은 이 얼음의 문장을 녹여버리는 일이 될 테니 그러진 말자.
ㅡ 해설, 신형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