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몽해항로 2 [장석주]

초록여신 2010. 8. 3. 09:21

 

몽해항로 2

ㅡ흑해행

 

 

 

 

 

 

 

 

 

 

 

 

잡풀들이 무너져 키를 낮추고

들에 숨은 웅덩이들이 마른다

가을 가뭄은 길고 꿈은 부쩍 많아지는데

사는 일에 신명은 준다.

탕약이 끓는데, 이렇게 살아도

되나, 옛날은 가고 도라지꽃은 지고

간고등어나 한 마리씩 먹으며 살아도 되나.

요즘 웬만한 길흉이나 굴욕은 잘 견디지만

사소한 일에 대한 인내심은 사라졌다.

어제 낮에는 핏물이 있는 고기를 씹다가

구역질이 나서 더 먹지를 못했다.

비루해, 비루해. 남의 살을 씹는 거,

내 구강(求腔)에서 날고기 비린내가 난다.

이슬람이라면 라마단 기간에 금식을 할 텐데,

금식은 얼마나 순결한가.

안성 시내에서 탄 죽산행 버스 안에서

취한 필리핀 남자 두 명을 만났다.

안성 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겠지.

황국이 피는 이 낯선 땅에서 술을 마시며

헤매는 저 이방의 노동자들!

 

 

기온이 빙점으로 내려가는 밤

서재에서 국립지리학회보를 들여다보는데

뼛속의 칼슘들이 조용히 빠져나간다.

지난해 이맘때 자주 출몰하던 너구리가

올해는 보이지 않는다.

하천 양쪽으로 콘크리트 옹벽을 친 탓일까.

배나무에서 배꽃 필 무렵

잉잉대던 벌들도 올해는 드문드문 보인다.

주변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많다.

가창오리들이 꾸륵꾸륵 우는 소리 들으니

집 아래 호수의 물이 어는 모양이다.

꿈속에서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버스를 탄다.

누군가 흑해행 버스라고 했다.

검은 염소들이 시끄럽게 울어 댄다.

한 주일쯤 달리면 흑해에 닿는다고 했다.

나는 참 멀리도 가는구나, 쓸쓸한 내 간을 위하여

누가 마두금이라도 울려 다오,

마두금이 없다면 뺨이라도

철썩철썩 때려 다오, 마두금이 울지 않는다면

나라도 울어야 하리!

 

 

 

 

* 몽해항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