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희망의 수고 [이병률]

초록여신 2010. 7. 6. 10:38

 

 

 

 

 

 

 

 

 

 

 

 

이십육년 동안 구멍가게의 주인이었던 어머니 아버지는

가게를 정리하시며

따로 나가 사는 아들을 위해 따로 챙겨둔 물건을 건네신다

 

 

검은 봉지 속에는

칫솔 네 개

행주 네 장

때수건 한 장

구운 김 한 봉지

 

 

치르려 해도 값을 치를 수 없는 검은 봉지를 들고

흔들흔들 밤길을 걸었다

문 닫힌 가게 때문에 더 어두워진 거리는

이 빠진 자리처럼 검었다

검은 봉지가 무릎께를 스칠 때마다 검은 물이 스몄다

 

 

그늘이건 볕이건 허름하게나마 구멍 속에서 비벼진 시절이 가고

내 구멍가게의 주인공들에게서

마지막인 듯

터질 것처럼

구멍의 파편들이 가득 든 검은 봉지를 받았다

 

 

 

 

* 바람의 사생활, 창비(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