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문패 [김명인]

초록여신 2010. 5. 27. 10:59

 

 

 

 

 

 

 

 

 

 

 

 

내 나태와 고독 가운데 지금 내가 서 있다

창밖엔 갓 얽어맨 생목을 채 기어오르지도 못한

덩굴장미 몇 줄기, 울타리에 기대 존다

푸른 오월이란 광막한 허공을 헤살지으려는

초록빛 커튼이 아니리라, 한낮의 무늬들을

온몸으로 짜고 있는 꽃송이들의 노역 앞에 서면

그 동안 내가 한 일은 서울에다 집 한 채 지었던 일,

그 집에 문패를 걸어두고 부재중의 대낮에

사백 리 밖에 서서 거울 저쪽의 햇살 파문이

덩굴 가시에 나른하게 제 몸을 비벼대는 것을 바라본다

몸을 얻기 위해 사르는 몸도 있다는 것을,

점점의 꽃잎을 쓸어다 집 앞에 부리려고 떠도는

바람 속에 내가 섰더냐,

그러므로 문패는 저 홀로 문패였으며, 도취는

깨어날 때 혼자 우는 것,

오랫동안 나의 적은 내가 키운 사랑이었고, 공허였다

한 생이 마취되어 흘러가는 아지랑이 사이로

들어서지 말라고 거듭 만류하는

피톨들의 곤두섬을 너는 아느냐?

오월이 장미 가시에 찔려 피의 분수 솟구칠 때

생목이 제 가지를 부러뜨려 흘린 수약

뭉쳐서 이룬 옹이를

시간의 울타리 밖에서 비로소 찾아낸다

하루의 빛을 낱낱으로 나누어도 등에 지기 힘든 것은

내 부재를 내가 살아왔다는 것,

그러므로 내 딸들아, 너희들은

그 부재에도 쓰지 말라, 한평생 내가 기댄

적막을 따라 지친 모험이 끝까지 가려고 하는

나그네의 뒷모습을 쳐다보지 말라, 마지막

손님이 올랐으므로

떠나려고 하는 그 배에

나는 지금 타고 있어 풍파의, 멀미 앞에 헛된 문패

이미 내려놓았으니

그 집에는 지금 주인이 없다

스스로 삭아내리길 기다리는 떠나온

항구만 거기 있을 뿐,

 

 

 

 

* 길의 침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