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로맨티스트 [하재연]

초록여신 2010. 4. 17. 06:59

 

 

 

 

 

어제는 당신을 만났고

오늘은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내일까지

이곳에서 살아있을 것이다

햇빛이 이렇게 맑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한 친구는 자살을 했다

장례식에서 우리는 십년 만에 만나

소풍을 떠나는 꿈을 꾼다

기차를, 기차를 타고

내년 겨울 우리는 모두 다른 나라에서

어떤 나라의 겨울은 또 다른 나라의 겨울과

어떻게 다른지

눈이 녹고 나면 강물은 더 차가워지는지

떨어진 벚꽃의 분홍은 어디로 갔는지

나는 쭈글쭈글한 아기를 낳고

그 조그만 아기를 업고서

시장을 볼 것이다

몇 개의 봉지들을 들고 거리에서 만나

우리는 모든 걸 감추거나

모든 걸 드러낸다

햇빛이 이렇게 눈부셔서

웃는지 우는지 모르는 표정으로

친구들은 빅토리를 그리며 사진을 찍을 것이다

당신도 다른 나라에서 돌아와

흰 셔츠와 검은 셔츠를 입고

하객이거나 문상객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견딜 수 있을 만큼

조금씩 살아간다

 

 

 

 (서시 가을호)

 

 

시작노트

 세계는 이상한 우연과 필연들로 짜여 있다. 어떤 우연을 필연으로 여기는 순간 당신은 로맨티스트이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필연을 우연으로 여기는 그 순간에도 당신은 로맨티스트인가? 내가 지금, 이 순간, 여기, 살아 있는 것은 그렇다면 우연인가? 당신은 마지막으로, 소풍을 가자고 말한다. 떠나지 못한 그 소풍은 아직 우리의 삶 어느 구석엔가 남아 있을 것이다. 죽음보다 낯선 삶을 견디고 있는 우리들을 위한 빅토리.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 작가, 2010. 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