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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편지 [이문재]

초록여신 2010. 4. 1. 10:33

 

 

 

 

 

 

 

 

 

 

꽃만 보고 갑니다

약속시간에 늦었다는 듯 서둘러 와서

꽃그늘 아래 잠깐 차를 세웠다가

꽃을 만발한 줄기와 나무는 보지 않고

땅 속으로 수천 수만의 꽃망울을 틔우고 있는

나무뿌리는 궁금해하지 않고

부르릉 두고 온 것이 있다는 듯 또 떠나들 갑니다

 

 

꽃만 보고 가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흐드러진 꽃을 핑계 삼아 지나간 풋사랑을

하르르 꽃비를 핑계 삼아 지난 긴 겨울을

세상 밖으로 난 것 같은 꽃길을 핑계 삼아

지난날들을 언뜻 떠올렸다가 팽개치고 갑니다

살아야 한다고 기어코 이겨야 한다고

이를 악물고 꽃그늘 떠나들 갑니다

 

 

꽃 보러 와서 꽃은 보지 않고

몸을 쉬러 왔다가 마음도 쉬지 못하고

분주하게 자동차만 왔다 갑니다

버리고 가는 사람은 버림을 당합니다

꽃 앞에서는 꽃 아래에서는

꽃만 보아야 합니다

꽃 앞에서는 꽃이 되어야 합니다

 

 

봄날 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굳이 꽃을 찾지 않아도

세상 가득한 숨어 있는 꽃들을 생각합니다

꽃이 한순간의 폭발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한 퍼레이드가 아니라

스스로 치열한 생존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 놀러 오세요

꽃이 꽃으로 보일 때

꽃과 더불어 뿌리와 땅이

하늘이 보일 때 그때 오셔서

꽃이 되어 더워졌다 가세요

그러면 우리들 일제히

그대 위로 그대의 몸 위로

떨어져내릴 겁니다

 

 

 

* 나는 가끔 진해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