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고장난 아침 [박남희]

초록여신 2010. 3. 1. 12:41

 

 

 

 

 

 

 

 

 

 

어쩐 일인지 나의 아침은 해가 뜨지 않고 해가 진다

그러므로 조금 전 내가 먹은 밥은 아침밥이 아니고 저녁밥인 모양이다

아침을 기다리듯 지금 내가 기다리는 여인은

손예진같이 생긴 젊은 애인이 아니고 마흔이 넘은 아내다

아내는 조금 전 내가 알지 못하는 길 쪽으로 걸어와

어둠보다 늦게 도착했다 그러나 다행히 새벽은 아니다

내가 읽은 책은 자꾸만 인생을 말하려고만 하고

나는 아침에 넘긴 책장 부근에서 자꾸 서쪽 하늘을 보게 된다

요즘은 거꾸로 나이를 먹는 파도가 반갑고

밀려왔다가 금방 다시 밀려가서

모래 위의 흔적을 지우는 것들의 단호함이 부럽다

동쪽 해가 하늘을 비껴 아름다울 때 내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와

자주 겹쳐지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보면 분명 아침은 아침인데,

한밤중이 다 되어서야 학교 갔다 돌아오는 고3 아들을 보니

내 아침은 참으로 고장난 아침이다

 

 

 

 

* 고장 난 아침, 애지(2009)

 

 새로운 "허공의 시간"을 감각한 시인은 특별한 아침을 맞이한다. 바로 "고장난 아침"이다. "해가 지는 아침"이라는 불구의 시간을 시인은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즐기고 있다. "어쩐 일인지"라며 뜬금없는 표정을 보이다가 "내가 먹은 밥은 아침밥이 아니고 저녁밥인 모양이다"라며 천연덕스런 태도를 보인다. 시인에게 시간이 뒤바뀌니 "해가 지는 아침"은 이제 일상적인 일이 된 모양이다. 일상의 일들이 뒤바뀐 시간 속에서 굴러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시인이 가진 내면이 세파 속에서 녹록치 않음을 보여준다.

 이제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싫으면 싫고, 부러우면 부러운 산책자로 와 있다. 시인은 세상을 보이는대로 보고 느끼는 대로 느끼며 산다. 그러나 세상의 지식인 책은 자꾸만 타인의 인생을 설명하려 한다. 시인에게는 "파도"가 반갑고 파도가 만들어내는 단호함이 부럽다. 시인은 고장 난 아침에 살지만, 자연이 주는 교훈은 잊지 않는다.

 ㅡ이재훈(시인), <작품해설- 공중에 풀린 영원성의 시각> 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