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수요일 [장석주]

초록여신 2010. 2. 3. 10:56

 

 

 

 

 

 

 

 

 

 

 

 나는 처음부터 알아봤어 네가 저 먼 데서 오는 비라는 걸 말이야 나는 수요일을 좋아해 수요일엔 비가 오거든 비가 내리면 양파꽃이 피거든 나는 양파꽃 아래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 비 맞는 걸 좋아해 비 비 비...... 피 피 피...... 수요일에 비가 내리는 건 기적이야 그렇지 기적들은 도처에서 일어나지 백 개의 경첩들이 만드는 기적에 나는 경탄해 모든 삐꺽거리는 문들의 문란한 사생활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백 개의 경첩들 아버지 당신은 내 인생의 경첩이었어요 그럼 뭘 해요 나는 겨우 수요일의 비나 기다리는걸요 오늘이 월요일이라면 수요일은 이틀이 남은 거야 오늘이 화요일이라면 수요일은 하루가 더 남은 거야 나는 수요일에 오는 비를 좋아해 네 빨간 하이힐을 좋아해 네 까만 눈썹을 좋아해 네 쇄골을 좋아해 비는 보리떡 두 개 생선 한 광주리 수요일엔 굶는 사람이 없어 백 명이 먹고도 남을 양식이야 잊지 말아 줘 수요일에 내가 양파꽃 아래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비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말이야 내 등을 두드리는 비 비 비...... 피 피 피...... 네가 비 혹은 망치라면 나는 네가 두드려 박는 못이야 네가 비 혹은 쇠로 된 추라면 나는 추가 때려 우는 종이 될 거야 오늘이 목요일이라면 수요일은 아직 멀었어 오늘이 금요일이라면 여전히 수요일은 멀리 있어 오늘이 토요일이라면 나는 지루해서 미칠 거야 오늘이 일요일이라면 조금 진정이 돼 내 기다림의 끝이 보이니까 오늘이 월요일이라면 나는 바빠질 거야 오늘이 화요일이라면 나는 꼼짝도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울 거야 수요일에 나는 양파꽃 아래서 개구리처럼 종소리를 내며 울고 있을 거야 수요일에 너는 오지 않을 테니까 수요일에 나는 여기저기 쓸데없이 뒹구는 못이 될 거야 수요일에 나는 울지 못하는 벙어리 종이 될 거야 수요일엔 비가 내릴 거야 하얀 양파꽃이 필 거야 나는 양파꽃 아래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비를 맞을 거야 수요일에 피 냄새를 풍기며 비가 내리면 나는 흙 묻은 몸으로 개구리와 함께 울 거야 비 비 비...... 피 피 피..... 개구리 한 마리 개구리 두 마리 개구리 열 마리 개구리 백 마리......

 

 

 

 

* 몽해항로, 믿음사(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