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몽해항로 5 [장석주]
초록여신
2010. 2. 2. 20:45
몽해항로 5
ㅡ 설산 너머
작약꽃 피었다 지고 네가 떠난 뒤
물 만 밥을 오이지에 한술 뜨고
종일 흰 빨래가 펄럭이는 걸 바라본다.
바람은 창가에 매단 편종을 흔들고
제 몸을 쇠로 쳐서 노래하는 추들,
나도 몸을 쳐서 노래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덜 불행했으리라.
노래가 아니라면 구업을 짓는
입은 닫는 게 낫다.
어제는 문상을 다녀오고,
오늘은 돌잔치에 다녀왔다.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작약꽃과 눈[雪] 사이에 다림질 하는 여자가
잠시 살다 갔음을 기억할 일이다.
떠도는 몇 마디 적막학 말과
여래와 같이 빛나는 네 허리를 생각하며
오체투지하는 일만 남았다.
땀 밴 옷이 마르면
마른 소금이 우수수 떨어진다.
해저보다 깊고 어두운 밤이 오면
매리설산(梅里雪山)을 넘는 야크 무리들과
양쯔강 너머 금닭이 우는 마을들을 떠올린다.
누런 해가 뜨고 흰 달이 뜨지만
왜 한번 흘러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가.
바람 불면 바람과 함께 엎드리고
비가 오면 비와 함께 젖으며
곡밥 먹은 지가 쉰 해를 넘었으니,
동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는 일만
남았다. 저 설산 너머 고원에
금빛 절이 있다 하니
곧 바람이 와서 나를 데려가리라.
* 몽해항로, 민음사(201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