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비단길 [남진우]

초록여신 2009. 11. 27. 18:14

 

 

 

 

 

 

 

 

 

 

 

 

해 지는 서역을 향해 걸었습니다

흙먼지 자욱이 이는 길

사랑하는 이여, 그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너진 담벼락 밑에서 배고픈 아이들은 놀고 있습니다

더러운 물이 흐르는 개천을 따라 걸으며

일거리를 찾아 서성거리는 허름한 옷차림의 사내들을 봅니다

만년설에 덮인 산이 저 멀리 지는 해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비루먹은 나귀라도 타고 떠나고 싶은 마음

창에 비치는 누군가의 그림자를 따라 일렁입니다

돌에 새긴 그리움도 시간이 흐르면 닳아 없어진다고

풀잎 위에 엎드린 작은 벌레가 전해주었습니다

기적처럼 갈라지는 길을 따라 사람들이 서역을 향해 걸어갑니다

수많은 탑과 누각으로 이루어진 신기루가 떠올랐다 지워지는 동안

해 지는 서역 낯선 길손들이 서성입니다

아무리 걸어도 설산은 가까워지지 않고

길가 유곽에서 흘러나온 작부들의 낭자한 노랫가락만

처마 밑에 내걸린 빛바랜 연등을 바스러뜨리며 퍼져나갔습니다

좀먹은 경전 펼쳐들어도 고원을 지나 내가 가야 할 길은

한이 없고

문득 꽃향기가 난다 싶어 고개를 들면 아득한 벼랑이었습니다

 

 

몹시도 바람 부는 날

해 지는 서역을 향해 걸었습니다

더이상 떨굴 잎사귀도 없는 앙상한 나무들 늘어선 거리 끝

사랑하는 이여, 보이지 않는 그대를 불러보았지만

어두워오는 하늘 저편에서 별똥별 하나 빠르게 져내렸습니다

 

 

 

 

* 사랑의 어두운 저편, 창비(2009.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