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짐승의 시간 [남진우]
초록여신
2009. 11. 27. 17:39
짐승의 시간
어느 사랑의 기록
네 속엔 허기진 짐승 한 마리 살고 있다
갈라진 식탁 턱과 억세게 휘어진 뿔을 가진 그놈은
해가 저물면 닳고 닳은 발굽으로 살얼음 낀 길을 내달린다
그 짐승이 노리는 것은 부드러운 살과 향기로운 피
그 짐승이 먹고 마실 때 네 영혼은 편히 휴식한다
그 짐승이 거리 한복판을 가로지를 때
세상은 흉흉한 소문으로 가득 찬다
여기저기 버려진 팔다리 흩어진
뼛조각과 살점들 그놈은
망설임 없이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어
그들의 안락을 가차없이 할퀴고 물어뜯는다
불의 눈을 치켜뜨고 쇳소리를 내는 저 짐승
그놈이 한번 몸을 날릴 때마다
거리는 일순간 비명으로 뒤덮인다
잠시 후 호루라기 소리를 등 뒤로 흘리며
너는 유유히 거리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다
누가 보았는가
누가 네 속의 그 짐승을 알아차렸는가
잔인한 범행이 휩쓸고 지나간 거리는
희미한 핏자국만 번들거리고 있을 뿐
어둑한 달빛 아래
집으로 돌아온 너는 이윽고
담장 아래 먹은 것을 다 토해놓는다
* 사랑의 어두운 저편 / 창비, 2009. 1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