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몰락의 아름다움 [허연]

초록여신 2009. 9. 13. 20:00

 

 

 

 

 

 

 

 

 

 

 

 다 무너져버린 콘크리트 더미 사이에서 고양이들이 짝짓기를 한다. 순식간에 장르가 바뀐다. 에로다. 며칠 전까지 이곳에서 벌어졌던 중장비들의 공포는 이미 잊혀졌다. 책 한쪽이, 달력 한 장이 이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을까.

 

 

 몰락은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눈부시다. 누군가가 받았을 우등상장이며, 냉장고에 달려 있었을 병따개며, 깨져 나뒹구는 변기하며, 공부방에 붙어있었을 결연한 맹세들... 이런 내밀한 서사(敍事)가 창자 밀려나오듯 밀려나와 있는 몰락은 눈부시다. 어차피 영원할 수 없었으므로 몰락은 눈부시다. 그리고 그 몰락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짝짓기란.

 

 

 중력에 대들던 것들이 모두 가로 누워버린 몰락의 한가운데서 고양이의 뱃속에 담겨 날아온 씨앗들도 싹을 틔우리라.

 

 

 똑바로 서 있던 벽들의 모습은 고양이들에게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다. 몰락은 완전하다.

 

 

 

 

* 시작詩作, 2009년 가을호 [오늘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