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크마개 [김남호]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잘 만들어진 코르크마개다
역시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잘 봉인된 내 할아버지다
믿거나말거나 나는
해가 거듭될수록
깊은 맛으로 숙성되는 내 아버지다
믿을 수 없겠지만
나는 지금,
코를 막고 썩어가는
내 아들이다
* 링 위의 돼지 / 천년의 시작, 2009. 9. 10.
'나'가 "코르크마개"가 되고, "할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되고, "내 아들"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 왜곡된 풍경을 거짓-유사로 만연한 이 세계의 비유로 읽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장면이 실제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사실을 밝히려는 무모한 노력보다는 오히려 이 시의 화자가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 믿음의 구조를 따져보는 일이 더 중요하다. 화자는 "믿기지 않겠지만" "역시 믿기지 않겠지만" "믿거나말거나" "믿을 수 없겠지만" 이라는 발화를 통해 이 상황에 대한 주체의 태도가 너무나 완고함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나'를 구성하는 물리적 요소와 사회적 지위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다만, '나'를 구성하는 물리적 요사와 사회적 지위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다만, '나'의 이러한 전변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고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나'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도는 '나'와 '너'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의 착란(「아마도 너는」)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동생이 "내 교복을 입고/내 운동화를 신고" "내 이름표를 달고"((「동생이 지나가네」) 지나가는 환시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이 세계는 거짓ㅡ유사로 만연하다. 결핍으로 인한 왜상들이 도처에서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과 거짓ㅡ유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주체의 고집 때문이다
ㅡ여태천(시인.동덕여대 교수), [해설] 삶과 죽음에 관한 오해와 진실 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