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참 좋은 저녁이야 [김남호]

초록여신 2009. 9. 12. 21:36

 

 

 

 

 

 

 

 

 

 

유서를 쓰기 딱 좋은 저녁이야

밤새워 쓴 유서를 조잘조잘 읽다가

꼬깃꼬깃 구겨서

탱자나무 울타리에 픽 픽 던져버리고

또 하루를 그을리는 굴뚝새처럼

제가 쓴 유서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종일 들여다보고 있는 왜가리처럼

길고도 지루한 유서를

담장 위로 높이 걸어놓고 갸웃거리는 기린처럼

평생 유서만 쓰다 죽는 자벌레처럼

백일장에서 아이들이 쓴 유서를 심사하고

참 잘 썼어요, 당장 죽어도 좋겠어요

상을 주고 돌아오는 저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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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호

1961년 경남 하동 출생. 경상대학교 수학교육과 졸업. 2005년 『시작』등단.

 

 

* 링 위의 돼지 / 천년의 시작, 2009. 9. 10.

 

 

 우리의 삶 속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숨겨져 있다.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살아간다. 하지만 언젠가 죽음은 어김없이 찾아와 삶의 본질이 죽음에 있음을 알려준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사실 삶 자체가 점진적인 죽음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죽음에 가까이 가고 있다. 죽음은 기휘(忌諱)하기 어려운 억압의 다른 이름이다. "백일장" 심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저녁. 화자는 문득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은 그렇게 느닷없이 찾아오지만 "제가 쓴 유서를 이해할 수가 없"는 우리는 삶과 죽음이 어떻게 다른지 모른다. "평생 유서만 쓰다 죽는 자벌레"가 바로 우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피할 수 없이 마주해야 하는 삶과 죽음을 "종일 들여다보고" 무섭도록 허무한 하루하루를 견뎌낸다. 진실과 거짓ㅡ유사의 차이와 의미를 알았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아니 결코 읽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백일장에서 아이들이 쓴 유서"에 삶과 죽음에 관한 오해를 무력화하는 말들이 진실하게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무섭도록 처연하게 옮겨놓은 이 시가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ㅡ여태천(시인.동덕여대 교수), [해설] 삶과 죽음에 관한 오해와 진실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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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손꼽아 기다리던 첫시집이 드디어 나왔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진 참 좋은 저녁이었습니다.

 

한때 우리 카페에서 <타클라마칸>이라는 닉네임으로 좋은 시와 해설을 해주시고

 

첫시집 『링 위의 돼지』탄생에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한 차례의 가을비가 지나간 오늘, 시집을 읽기에 참 좋은 저녁입니다.

뜨겁게 사랑받기를 바라겠습니다.

(시집을  읽기에 참 좋은 저녁에, 초록여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