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立秋) ........ 정양
더위는 아직 얼마든지 남아 있고
몹쓸 병이나 들었는지 여름내
걸핏하면 목이 잠긴다
언젠가는 너를 꼭 만날 것처럼
미리 목이 잠긴 채
세상일 부질없고 헛되다는 걸
한평생 헛것에 매달려 산다는 걸
나는 영영 깨닫지 못할 것만 같다
영영 깨닫지 못하더라도
깨닫지 못하는 걸 슬퍼할
가을은 이 세상에 꼭 와야 한다고
미리 목이 잠겨서
징징거리며 그시랑* 운다
--------------
* 그시랑: 지렁이
* 철들 무렵 / 문학동네, 2009. 7. 27.
입추는 아직 여름의 여운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미 내부로부터 여름날의 무성한 양의 기운이 수그러들고 서서히 음의 기운이 발현되기 시작한다. 여름의 직선적인 외적 확산도 사실은 "부질없고 헛"된 것은 아닐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하고 마침내 소멸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한평생 헛것에 매달려 산다는 걸/나는 영영 깨닫지 못할 것만 같다". 이러한 목소리에는 여름의 절정기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의 정감이 묻어난다. 그렇다고 해서 "가을"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세월이 물결처럼 흘러가고 모든 것이 변화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떨칠 수 없다는 것이다. "미리 목이 잠겨서/징징거리며 그시랑" 우는 소리에는 지난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기다림의 정감이 혼재한다.
ㅡ홍용희(문학평론가), [해설] 우주 생명의 리듬과 인간의 시간 중에서 발췌.
.......
어제가 "입추"였다.
비가 쏟아졌던 곳이 있었지만 여전히 전국의 대부분은 무더웠다.
어쩜, 그 무더위는 여름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었을까?
정양의 시집 『철들 무렵』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24절기와 설날, 대보름, 한식, 동지, 단오, 칠석, 추석 소재로 된 시가 많이 등장한다. 세시풍속의 즐거움을 논한 시집으로 기록될 것 같다.
그런 류에 박식한 우리 아버지가 좋아할 시집이다. ㅎㅎ
음력과 양력으로 전해지는 해와 달의 순환은 우리 인간사의 끊임없는 생로병사, 희노애락을 낳았다고 본다.
산다는 것은 참 오묘한 조화이니까.
이 시집을 통해 그런 우리의 삶을,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인간사를 바로아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정양의 시집 『철들 무렵』은 주로 세시풍속의 전통과 이에 상응하는 인간 삶의 문화와 자신의 생활감각을 노래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자본주의 일상 속의 '세속적 시간'의 지배 속에서 우주적 근원의 '신성한 시간'을 깨우고 재상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다.(홍용희(문학평론가), [해설] 우주 생명의 리듬과 인간의 시간 중에서 발췌.
무덥지만 분명 절기상으로는 "입추"로 들어섰다.
해와 달의 신비로운 조화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정된 시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네가 철들 무렵일 것이다.
여름이 곧 떠날 것임은 곧 사실화 될 것이다.
자지러지는 매미의 울음이 처절하게만 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는 여름에 대한 안녕을 준비할 때, 초록여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