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붉은 우체통이 목련꽃을 피운다 [정일근]
초록여신
2009. 6. 17. 05:52
오늘 새벽 붉은 우체통 옆 목련나무에 목련꽃 피었다.
두레박으로 퍼올릴 수 없는 세월 우물처럼 고여
빛깔과 향기로 잘 익은 깊은 산속 절집 마당에
세상의 마을과 사람에게로 이어지는 모든 길들을
제 몸 속에 담고 있는 키 작은 붉은 우체통이 있었는데,
붉은 우체통 그 옆에는 목련나무 한 그루 서 있었는데,
목련나무는 알고 있었다
산사의 어두운 밤이 슬금슬금 내리면 살금살금 숨어 찾아와
삐뚤삐뚤 사연을 적어 하늘나라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던
파르스름한 머리, 먹빛 가사를 입은
착한 눈빛의 동승을 목련나무도 알고 있었다.
붉은 우체통은 동승의 편지를 삼킬 때마다
수신인의 주소가 없는 편지를 삼킬 때마다
제 몸 속에는 찾을 수 없는 길 하나로 하여
끝닿을 수 없는 깊고 깊은 고해의 바다가 되고,
행여나 동승에게 제 마음 들킬까 싶어
발자국 소리 절 안으로 사라진 한참 뒤에서야
긴 한숨을 쉬었다. 슬픈 봄밤
보내지 못한 편지 위에 또 다른 편지가 쌓이고
붉은 우체통은 자신의 몸에 쌓이는 기다림의 무게에
어쩔거나 이 일을 어쩔거나, 홍열이 더욱 붉어지고
그 옆에 서서 내려다보던 목련나무도 함께 붉은 신열이 올라
오늘 새벽 숨길 수 없는 비밀 그분에게 죄다 고백하듯
가지마다 가득히 목련꽃이 피었다. 활짝 피었다.
*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