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시 모음....살구
살구나무의 무거움에 관하여
최 금 진
어둠이 까놓은 알들이 눈을 뜬다
살구나무의 흔들리는 두통 속에서도
붉게 뇌종양이 켜진다
그의 둥근 얼굴 위에 세워졌던 창 밖의 가로등들이
안 보이는 커브길로 사라진다
대문도, 문패도 없는 그의 막노동이
월급봉투처럼 행복하게 입맛을 다셔보았을
살구 싶다, 살구 싶다, 최면처럼 굵어진 살구알들
뇌수가 터져 발 밑에 흥건하다
바람은 늦은 조문객이 되어 흥청거리고
일찍 온 사람들의 그림자는 가늘게 춤을 추는데
그가 누워있던 방은 안과 밖을 가른다
창 밖으로 하루의 끝물인 날벌레들을 불러 모은다
텅 빈 까치집처럼 하늘에 달은 비어있고
살구 싶다, 살구 싶다, 울음 끝에
매달려 있던 살구알들이 떨어지는 밤이다
살구나무 여인숙
장석남
-제주에서 달포 남짓 살 때
마당에는 살구나무가 한 주 서 있었다
일층은 주인이 살고
그 옆에는 바다 소리가 살았다
아주 작은 방들이 여럿
하나씩 내놓은 窓엔
살구나무에 놀러 온 하늘이 살았다
형광등에서는 쉬라쉬라 소리가 났다
가슴 복잡한 낙서들이 파르르 떨었다
가끔 옆방에서는 대통령으로 덮은
짜장면 그릇이 나와 있었다
감색 목도리를 한 새가 하나 자주 왔으나
어느 날 주인집 고양이가
총총히 물고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살구나무엔 새의 자리가 하나 비었으나
그냥 맑았다 나는 나왔으나 그 집은
그냥 맑았다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문태준
외떨어져 살아도 좋을 일
마루에 앉아 신록에 막 비 듣는 것 보네
신록에 빗방울이 비치네
내 눈에 녹두 같은 비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나는 오글오글 떼 지어 놀다 돌아온
아이의 손톱을 깎네
모시조개가 모래를 뱉어놓은 것 같은 손톱을 깎네
감물 들듯 번져온 것을 보아도 좋을 일
햇솜 같았던 아이가 예처럼 손이 굵어지는 동안
마치 큰 징이 한 번 그러나 오래 울렸다고나 할까
내가 만질 수 없었던 것들
앞으로도 내가 만질 수 없을 것들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이 사이
이 사이를 오로지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의 혀끝에서
뭉긋이 느껴지는 슬프도록 이상한 이 맛을
살구나무 아래
강인한
살구나무 한 주가 탱자울타리 안에 서서
연년생으로 아이 셋을 낳고
그 집을 떠날 때까지
우리 식구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아침마다
꽃잎이 바람에 날리며 아이들 이름을 부르는지
그리고 어느새 봄이 가는지도 모르게
도랑물에 귀를 적시고
문 밖에서 보리가 익어갈 때
스스스 바람소리를 내며
보리까시락은 아기 업은 아내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싶어하였다
낮은 굴뚝에서 삭정이를 때는 굴풋한 연기
마당에 구름처럼 퍼지는
가을 해거름이 나는 좋았는데
사르락사르락 격자문의 창호지에
깊은 밤 눈발이 부딪는 소리를 손에 쥔 채
젖먹이를 안고 잠든 아내는 왕후의 꿈을 꾸었다.
살구나무와 통하다
이안
살구 꽃봉오리를 활짝 터뜨리는 건
살구나무가 아니다
살구나무는 꽃봉오리의 어느 절정에서
꽃을 향한 간곡한 기도를 내려놓는다
꽃봉오리와 꽃의 그
빛나는 순간에
들어올렸던 손을 슬그머니
거두어들인다
한 상 가득 꽃봉오리를 차려놓고
몇 걸음 물러나
꿀벌과 나비와 방울새를
기다리는 것이다
문고리까지만 따고
자기는 돌아가는 것이다
살구꽃이 지는 자리
정끝별
바람이 부는 대로
잠시 의지했던 살구나무 가지 아래
내 어깨뼈 하나가 당신 머리뼈에 기대 있다
저 작은 꽃잎처럼 사소하게
당신 오른 손바닥뼈 하나가 내 골반뼈 안에서
도리없이 흩어지고 있다
꽃 진 자리가 비어간다
살구 가지 아래로 부러진 내 가슴뼈들이
당신 가슴뼈를 마주보며 꽃 핀 자리
한 잎 뺨 한 잎 입술 한 잎 숨결
지는 꽃잎도 저리 인연의 자리로 쌓이고
문득 바람도 피해간다
누구의 손가락뼈인지
묶였던 매듭을 풀며 낱낱이 휘날리고 있다
하얗게 얼룩진 꽃 그늘 아래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부쳐준 오래된 편지 한 장을 읽으며.
살구나무 변소
박성우
부안 감다리집 마당에는
살구나무 변소가 있는데요
볼일 보러 변소로 가면
살구나무가 치마 내리는 것을 훔쳐보다가는요
엉덩이 까고 후딱 앉으면요 후딱
시치미 떼고 서 있는 엉큼한 살구나무가
한눈에 들어오는 변소가 있는데요
안쳐다본 척 하다가는요
볼일 다보고 치마 올리고 일어서는 순간에요
후딱 변소 안을 들여다보는 엉큼한 살구나무가 있는데요
네 칸 널빤지 조각을 대어 변소문짝을 만들었다가는요
뜬금없이 위쪽 한 칸을 떼어내고는
오살헐 살구나무 풍경을 덧대놓은 것이 문제는 문제이겠지만요
그 보담은 오살헐 살구나무와 은근한 뭣을 즐기기라도 하듯
살구나무 변소를 찾는 사람도 문제는 문제인데요
그니깐, 죽으면 죽었지 살구나무 변소에는
얼씬도 못 할 줄 알았던 서울내기 제 색시가요
구린내나는 살구나무 변소를 갔다오더니만요
살구나무 변소 참 좋다 하는 것도 문제는 큰문제이겠지요
알고 보면, 살구나무 변소는요
부안 감다리에 사는 울어머니 작품이기도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