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국수나 말아볼까 [고영]
가늘고 고운 햇발이 내린다
햇발만 보면 자꾸 문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다
종일 들판을 헤집고 다니는 꼴을 보고
동네 어른들은 천둥벌거숭이 자식이라 흉을 볼 테지만
흥! 뭐 어때,
온몸에 햇발을 쬐며 누워 있다가
햇발 고운 가락을 가만가만 손가락으로 말아가다 보면
햇발이 국숫발 같다는 느낌,
일 년 내내 해만 뜨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면
그럼 모든 것이 타 죽어 죽도 밥도 먹지 못할 거라고
지나가는 참새들은 조잘거렸지만
흥! 뭐 어때,
장터네 나간 엄마의 언 볼도 말랑말랑
눈 덮인 아버지 무덤도 말랑말랑
감옥 간 큰형의 성질머리도 말랑말랑
내 잠지도 말랑말랑
그렇게 다들 모여 햇발국수 한 그릇씩 먹을 수만 있다면
눈밭에라도 나가
겨울이 되면 더 귀해지는 햇발국수를
손가락 마디마디 말아
온 셋아 슬픔들에게 나눠줄 수만 있다면
반짝이는 눈물도 말랑말랑
시린 꿈도 말랑말랑
*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문학세계사(2009. 5. )
이 시가 아름다운 것은 세계 속에 완전히 용해된, 그리하여 세계와 더불어 일렁이는 화자의 위치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긴장과 적의를 완전히 놓아버린 상태에서 오는 평온함과 아련함. 어린시절에나 가능했을, 온몸으로 세계와 동화가 되는 그러한 상태가 시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언어들은 또한 어떠한가.
'햇발국수'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 형성되는 말랑말랑함, 부드러움, 찰짐 같은 느낌들이 시 전체를 감싸고 있다. '햇발'은 '사방으로 뻗친 햇살'이라는 뜻이고 '국수발'의 '발'은 '실이나 국수 따위의 가늘고 긴 물체의 가락'이라는 뜻이므로 분명히 '햇발'과 '국수'는 무관한 것이지만, 이 시를 읽는 중에 '햇발국수'는 이미 있는 단어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찰지고 고운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정말로 햇발을 잘 말아서 한 그릇 따뜻한 국수를 먹는 것처럼,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살의 느낌이 전달되어 온다. 언어의 섬세한 결이 풍경의 섬세한 결을 잘 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ㅡ 문혜원(문학평론가. 아주대 교수), 해설 [인간과 언어와 풍경의 섬세한 결] 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