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삼겹살에 대한 명상 [고영]

초록여신 2009. 6. 6. 10:50

 

 

 

 

 

 

 

 

 

여러 겹의 상징을 가진 적 있었지요

언감생심, 일곱 빛깔 무지개를 꿈꾼 적 있었지요

불판 위에서 한 떨기 붉은 꽃으로 피어나기를

간절히 바란 적 있었지요

 

 

흰 머리띠를 상징으로 삼았지요

피둥피둥 살 바에는 차라리

불판 위에 올라 분신자살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지요

육질이 선명할수록 사상도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거든요

달아오른 불판이 멀리 쏘아 올리는 기름은

발가벗은 내 탄식이었지요

 

 

몸 뒤틀고 몇 번쯤 뒤집혀지고 나면

(제발, 세 번 이상은 뒤집지 마세요)

내 사명도 끝난 줄 알았지요

노릿하게 그을린 얼굴들이 참기름을 두르고 앉아

마늘처럼 맵게 미소를 주고받을 때

소원할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은

저 말라비틀어진 살점들을 어찌할까요

 

 

어쩌다 간혹 안부나 물어봐주세요

그러면 나는 그냥

무지개를 꿈꾸다 죽은 한 마리 돼지의 어쩔 수 없는 옆구리였다고,

불판 위의 폭죽이었다고,

웃기는 돼지였다고 웃으며 말할 날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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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

1966년 경기 안양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했다.

2003년 《현대시》로 등단했으며 2004년,2008년 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을 받았다.

현재 《내일을 여는 작가》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너라는 벼락을 맞았다』가 있다.

 

 

 

 

 

*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 문학세계사, 2009. 5. 8.

 

 

 

.......

아침부터 바람을 타고 삼겹살의 안부가 물씬 전해져오네요.

어쩜,

저 냄새는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전갈이 아닐런지요?

누군가는 삼겹살에 기뻐하고,

누군가는 돼지의 죽음을 애도하고

서로 상반되는 낯선 풍경 앞에서

그저 발가벗긴 돼지의 삶을 애석해합니다.

(삼겹살 냄새 폴폴, 초록여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