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연재를 시작하며
한국일보 | 입력 2009.01.05

실존인물이든… 허구인물이든… 아이돌이든… 낯설지않은 여자들 삶속으로 '코드' 끄집어내 단상 담을것 "페미니즘이나 마초 코드가 아닌 '자이노파일'로서 그녀들에 대한 호의적 생각들, 흥미와 생각의 깊이 교감했으면…"
다음 월요일 아침부터 한 주에 한 차례씩 살필 소재는 여자(들)다. 그 소재(들)는 여자(들) 일반이 아니라 특정한 여자(들)다. 독자들이나 내가 적어도 이름은 알고 있는 여자들. 이런 소재를 고른 것은 내가 여자를 좋아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내가 페미니스트라는 뜻이 아니다. 나는 페미니스트도 마초도 아니다. 그저 남자에게보다 여자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남자일 뿐이다.
흔히 쓰는 말은 아니지만, 나에게 영어 단어로 딱지를 붙인다면 '자이노파일'(gynophile) 정도가 될 테다. 잉글랜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앵글로파일(anglophile)이라 부르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시네파일(cinephile)이라 부르듯, 나는 여자를 애호하는 자이노파일인 것이다.(이 낱말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까지 올라간다.
이 말의 앞부분은 '여자'라는 뜻의 그리스어 단어[gune]가 변한 것이고, 뒷부분은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형태소[-philes] 가 변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자이노파일을 자처할 때, 이 영어 낱말에 담긴 성적(性的) 함의까지 껴안는 것은 아니다.
흔히, 나는 여자와 수다떠는 것이 여자와 섹스하는 것보다(못지않게?) 즐겁다. 나는 여성이라는 '섹스'를 좋아한다기보다 여성이라는 '젠더'를 좋아한다. 그 둘이 늘 또렷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겠으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이 행성에서 살다 죽은 수백억(?) 인류 가운데 절반 안팎은 여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쓰는 사람들은 그만한 비율을 여자들에게 할당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기록된 역사는 압도적으로 남자들의 역사다. 그 불공평함의 책임을 역사 기록자의 편견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모계사회(라는 것이 정녕 있었을까?)가 막을 내린 뒤, 역사는 남자들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실천함으로써 역사를 만들어온 것은 주로 남자였다.
어떤 이유에서든, 역사의 실천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소극적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여성을 남성보다 '덜 중요한 성'으로 만들었다. 그러니 공정한 역사 기록자라면, 역사가 남녀 각각에게 부여한 기능 부담의 불공정성을 공정하게, 다시 말해 불공평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에 가장 널리 퍼진 종교의 성서 자체가 여자의 부차성(副次性)이나 종속성을 선포하고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하느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 남자를 만들었고, 그 남자의 갈비뼈 하나를 취해 여자를 만들었다.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에 불과한 것이다.
역사에 기록되는 '행운'을 지닌 여자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주로 극단적 역할을 맡았던 이들이다. 전형적 예로 잔다르크를 들 수 있다. 그녀에겐 성녀(聖女)의 이미지와 광녀(狂女)의 이미지가 뒤섞여 있다.
그녀를 저주하며 불태워 죽인 사람들에게나 그녀를 '오를레앙의 성녀'로 숭배하는 사람들에게나, 잔다르크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그녀의 거처는 천당이거나 지옥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 위에는 그녀의 자리가 없다.
특별히 악독하거나 특별히 거룩한 여자들만 역사에 기록된다. 잉글랜드 여왕 메리1세(피의 메리ㆍBloody Mary)나 프랑스 앙리2세의 비(妃) 카트린 드 메디시스(이 두 여자의 손은 신교도의 피로 흥건했다), 또는 성모 마리아나 테레사 수녀 같은 이들 말이다.
우리가 다음 주부터 살펴볼 여자들이 반드시 그런 극단적 여성들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주 평범한 여자들도 아니다. 너무 평범해서 역사 기록자의 눈이나 작가들의 상상력에 걸려들지 않은 여자(들)를 내가 찾아내거나 지어내서 살펴볼 수는 없다. 이 연재물은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필 여자들은 우리에게 이미 알려진 여자들이다.
그녀들의 범주는 넓다. 누구는 지금 살아있을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구는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 누구는 10대의 아이돌 그룹 멤버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구는 80대의 소설가나 극작가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그 80대의 소설가나 극작가가 만들어낸 인물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나는 이 연재물의 주인공들을 실존했던(하는) 여자들에 한정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가의 상상력 속에서 빚어진 여자들도, 그러니까 예술작품 속의 여자들도, 그 삶이 흥미롭다고 판단되면, 나는 펜을 들이댈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내가 꽤 공정한 사람인 듯 보인다. 죽은 자와 산 자를 차별하지 않고, 실존인물과 허구인물을 차별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살펴볼 여자를 고르는 일에서 나는 매우 편파적이고 불공정하기 쉬울 것이다.
나는 우연히 내 눈에 걸려든 여자들만을 살필 것이다. 나는 살펴볼 여자들의 리스트를 만들지 않았다. 그것은 네 해 전 '시인공화국 풍경들'을 쓸 때부터 실천해온 원칙이다.
무원칙이라는 원칙을, 비체계라는 체계를 나는 선호한다. 그 여자들은 어느 날 일식집에서 초밥을 집는 내 젓가락에서 튀어나올 수도 있고, 서울 지하철3호선에 나붙은 광고에서 튀어나올 수도 있다.
홍제천변을 스치는 내 걸음걸이에서 떠오를 수도 있고, 잠자리에서 읽는 만화책에서 떠오를 수도 있다. 그 결과는 치우침으로 나타나기 쉬울 것이다. 이를테면 특정한 시대나 공간의 여자들이 다른 시대나 공간의 여자들보다 훨씬 더 많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 선택은 인물의 역사적 중요도가 아니라 내 취향과 변덕을 반영할 것이다. 앞질러 짐작해보자면, 동양(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으나) 여자보다는 서양 여자가 더 자주 나올 것 같고, 옛날 여자보다 비교적 가까운 시기의 여자들이 더 자주 나올 것 같다.
그러나 이 무원칙 안에서도 작동하는 원칙은 있을 것이다. 우선 나는 독자들 귀에 익숙한 여자들을 고르려고 애쓸 것이다.
이를테면 허난설헌이나 로자 룩셈부르크나 퀴리부인이나 힐러리 클린턴이나 박근혜 같은 실존여자들, 샤흐라자드나 보바리 부인이나 마농 레스코 같은 이야기 속 여자들, 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그림이나 음악의 소재가 된 여자들. 방금 거론한 이들을 이 연재물에서 다 다루겠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대다수 독자들에게 낯설 것이 분명한 인물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대상 인물에 대한 사전 정보를 독자들과 내가 많이 공유할수록, 소통이 매끄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원칙이 없다면, 나는 우리 동네 슈퍼마켓의 여점원 얘기나 가끔 들르는 도서관의 사서(司書) 얘기를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그렇게 사적으로만 알고 있는 여자(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룰 여자들은, 실존인물이든 허구인물이든, 꽤 유명한 사람들이다. 역사학자들의 관심이나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한 여자들 말이다. 이따금 일부 독자들의 귀에 선 이름이 나올지도 모르겠으나, 원칙적으로 이 시리즈 '여자들'은 '유명한 여자들'이다.
유명한 여자들을 골라야 할 이유가 독자들의 (잠재적) 관심만은 아니다. 나는 이 연재물에서 어떤 여자(들)의 일대기를 쓸 생각이 없다. 혹시 내가 로자 룩셈부르크나 클라라 체트킨을 등장시킨다면, 나는 이 유명한 사회주의자들의 생애를 밑두리콧두리 늘어놓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정보들은 백과사전이나 전기물(傳記物)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나는 그녀들의 생애에 대해 독자들이 상당한 정보를 독자들이 이미 지니고 있다고 치고, 혁명의 열정과 사랑의 열정이 교차하는 모습이나 19세기 말 20세기 초 여성운동을 들여다보며 내 소감을 늘어놓을 것이다.
혹시 내가 마농 레스코나 보바리 부인을 등장시킨다면, 아베 프레보나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소설을 요약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독자들이 그 소설들을 읽었다고 치고, 여자들의 환상과 변덕과 허영심에 관심을 집중시킬 것이다.
물론 그들 생애의 정보를 아예 생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누군가의 삶에 대한 정보가 완전히 생략된다면, 그 사람에 대해 무슨 논평을 하는 것에 아무런 뜻이 없을 테니 말이다. 나는 주인공들의 전기적(傳記的) 정보를 되도록 헐겁게 스케치하고, 그 여자들의 삶(의 어떤 순간)에서 내가 떠올린 잡감에 집중할 것이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이 연재물은 여자 얘기가 아니다. 어떤 여자를 실마리 삼아, 시쳇말로 '코드'를 끄집어내, 그 코드에 대한 내 생각을 담는 이념적 에세이가 될 것이다.
나는 페미니즘 코드로 여자들을 옹호할 생각도 없고, 마초 코드로 여자를 낮추볼 생각도 없다. 그러나 내가 본디 자이노파일인 만큼, 내 생각의 회로는 그 여자(들)의 삶에 친화적이고 호의적이기 쉬울 것이다.
이 유명한 여자들에 대한 내 이런저런 생각들이 독자들의 흥미를 끌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더 바라는 것은 그 생각이 깊이를 획득하는 것이다. 그 둘 다를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1> 로자 룩셈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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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 입력 2009.01.12
혁명과 사랑의 불꽃 연인에게만 여자였던, 돌덩이처럼 단단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혁명의 희망이 가뭇없이 사라진 시대에 새된 목소리로 혁명을 구가하는 것만큼 허영심을 채워주는 일도 찾기 어렵다. 그 허영 놀이에는 아무런 위험도 뒤따르지 않는다. 비밀경찰의 감시도, 구사대의 폭력도, 고문의 공포도, 생명의 위협도.


그 혁명은 현실 바깥의(차라리 중심부의) 패션이고 놀이다. 체 게바라의 초상을 아로새긴 티셔츠가 한 시절 세상을 휩쓴 것도 그런 '안전한' 허영 놀이였을 테다. 그 옷을 입은 누구도 실제로 체 게바라처럼 되고자 하지는 않았을 게다. 되고 싶어도 될 길이 (거의) 없었다. 혁명은 과거사다.
그것은 일어날 수 없는 가상의 서사다. 그래서 아무리 과격한 혁명의 언어를 발설해도 잡아갈 '에이전트'가 없다. 외려 유행에 민감한 '에이전트'라면, 제 아이에게 게바라 티셔츠를 입힐 것이다.
티셔츠에 아로새겨진 게바라는 체제의 안녕을 전혀 위협하지 않으면서, 진보, 혁명적 낭만주의, 세련된 지성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것은 지적 도덕적 데커레이션이었고, 이상주의자의 거짓 신분증이었다.
그래서 체제는 게바라 바람을 내버려두었다. 대학 강단의 '좌익' 교수가 우익 신문에 게바라를 기리는 글을 써도, 젊은이들이 그 '과격한' 혁명가의 '티셔츠 동지'가 되어도, 체제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자본에 빨려 들어간 게바라라는 이름은 임박한 혁명의 표징이 아니라 사라진 혁명의 전설이었으므로. 그것도 벌써 한 세대 전 얘기다.
게바라 티셔츠를 팔아 돈을 번 의류업자에게 나는 또 하나의 세련된 아이콘을 소개하고 싶다. 게바라 못지않은, 아니 게바라를 넘어서는 소비사회의 매력적 혁명 아이콘을. 이번엔 여자다.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라는 이름의 여자. 명민한 자본가들이 아직까지 이 여자를 그대로 놓아둔 것이 신기하다.
우선 나부터도 허영심이 '체'보다 '로자' 쪽에 훨씬 더 쏠리는데 말이다. 그녀는 파리코뮌의 해, 그 코뮌의 달에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베를린의 스파르타쿠스단 봉기(고대 로마의 노예봉기 지도자 이름에서 따온 공산주의자들의 봉기다) 때 죽었다. 그 죽음도 게바라보다 더 극적이다.
'체'는 미국 비밀경찰이 지휘하는 볼리비아 군인에게 총살당했지만, '로자'는 한 때의 동지가 집권한 '제2의 조국'에서 군인의 개머리판에 이마를 맞고 확인사살을 당한 뒤, 베를린의 운하에 내던져졌다.
그 죽음을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노래했다. "붉은 로자도 사라졌네/ 그녀의 몸이 쉬는 곳마저 알 수 없으니/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말했고/ 그 때문에 부유한 사람들이 그녀를 처형했다네." 몇 달 후 로자의 시체가 물 위로 떠올랐을 때 그녀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부패했다. 그 '붉은 로자'는 '피투성이 로자'였다.
로자의 삶도 게바라 못지않게 극적이었다. 그녀는 러시아 국적을 지닌 유대계 폴란드인으로 태어났고, 바르샤바의 중학생 시절 '프롤레타리아당'의 세포에 가입했고, 대학에 여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조국을 떠나 스위스의 취리히로 건너갔고, 위장 결혼을 통해 독일 국적을 얻었고, 러시아와 폴란드와 독일 세 나라의 혁명 운동에 발을 담갔다.
그녀는 친구보다 적이 훨씬 많은 사람이었다. 그 적은 부자들 사이에만 있는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도 있었다.
사회민주주의운동을 폴란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수행하려는 움직임을 비판함으로써, 그녀는 폴란드 동료들에게서 미움을 받았다. 로자가 선택한 '진짜' 조국은 폴란드도, 독일도, 러시아도, 가상의 시오니스트 국가도 아니었다. 로자의 조국은 프롤레타리아였고, 그녀는 죽을 때까지 철저한 국제주의자로 일관했다.
자신의 당, 독일사회민주당이 국방예산 증액을 거들자 그녀는 이를 격렬히 비판함으로써 당 동료들로부터 소외되었다. 애국주의가 모든 것을 삼켜버린 세계전쟁 시기에 반전주의자로 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독일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국제주의를 버리고 애국주의에 투항했다.
로자는 감옥 안팎에서 그런 훼절을 통렬히 비판한 극소수의 사회주의자에 속했다. 그녀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한쪽 발을 저는 유대인이었는데, 이것마저도 (반동진영으로부터만이 아니라 소위 혁명진영으로부터) 야비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 시절 사회주의의 지도적 혁명가들이 흔히 그랬듯, 로자도 학자와 기자를 겸했다. 그는 < 자본축적론 > 과 < 사회민주주의의 위기 > 를 쓴 경제학자였고, < 노이에 차이트 > < 라이프치히 폴크스차이퉁 > < 로테 파네 > 를 비롯해 여러 매체에 쉴 새 없이 글을 써댄 기자였다.
그러나 그녀의 펜은 혁명을 선동하는 글보다 사랑을 갈구하고 고백하는 글에 훨씬 더 많은 잉크를 소비했다. 그 연애편지들의 수취인 가운데 로자가 제 가슴 가장 깊이 담은 사람은 그의 스승이자 동지이자 애인이자 사실상의 남편이었던 리투아니아 출신 유대인 레오 요기헤스였다.
로자의 친구였던 루이제 카우츠키(카를 카우츠키의 아내)의 레토릭에 따르면 "로자의 불같은 성격은 레오라는 기름을 만나 타오를 수 있었다."
계급의 적에게 돌덩이처럼 단단했던 로자는 레오 앞에서 수줍은 아가씨가 되었다. 로자가 품었던 여러 모순 가운데 첫 번째가 레오와의 관계였다.
사민당의 가까운 동료들에게까지 가차없었던 그의 필봉은 레오에게 쓴 연애편지에선 한없이 말랑말랑한 응석으로 무뎌졌다. 그녀가 '디오디오'라는 애칭으로 불렀던 레오는 운동의 선배였지만 주로 지하활동에 종사해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로자만큼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독립 여성의 상징이라 해도 좋을 로자가 레오 앞에서만은 순한 양이 되었다. 외면적 사회민주주의 운동에서 로자의 공적(公的) 짝은 한 날 거의 같은 시각에 살해된 카를 리히프크네히트였지만, 로자의 로맨스 속에서 그 자리는 그들보다 두 달 쯤 뒤에 처형된 레오의 것이었다.
그 시절엔 사회민주주의라는 말을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쓰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베른슈타인 같은 수정주의자들도 자신을 사회민주주의자라 일컬었지만, 대체로 사회민주주의는 혁명적 사회주의, 곧 공산주의를 뜻했다.
독일 사민당의 전쟁 지지에 환멸을 느껴 탈당한 동료들과 함께 독일 공산당을 창건한 로자는 내심 공산주의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타협적, 혁명적, 국제주의적 사회주의자였다는 점에서 로자는 일생동안 공산주의자였다.
나는 로자의 만년에 러시아에서 실현되기 시작한 공산주의를 혐오한다. 그 점에서 나는 로자주의자가 아니다. 그런데 로자의 사회적 전망에는 모호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그는 레닌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였지만, 10월혁명을 전후한 레닌의 독선적 행태에 부정적이었다.
이를테면 레닌이 독일군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로 잠입한 것이나, 제국주의 독일과 굴욕적 정전협정을 맺은 것 따위는 로자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거기서 그녀의 반전주의는 흐릿해졌다. 주로 선전선동의 일을 맡았으면서도, 로자는 레닌의 전위당 이론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말하자면 로자에게는 민중주의 편향이 있었다.
그러나 레닌이 로자를 가장 크게 실망시킨 일은 10월혁명 이후에 일어났다. 실질적 소수파였던 볼셰비키(다수파)를 이끌고 혁명에 성공한 뒤 실시한 총선에서 패배하자 레닌은 이를 힘으로 무효화했고, 로자는 서유럽의 부르주아 정치인들 이상으로 신랄하게 레닌을 비판했다.
그녀는 그 때 "일당의 당원들만을 위한 자유는, 그 당원들 수가 아무리 많아도, 결코 자유가 아니다"라고 일갈하며 소비에트 체제의 경직화를 우려했다.
로자에게 자유란,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었다. 그 점에서 그녀는 '위대한 반대자'라 불렸던 미국 법률가 올리버 홈스의 동지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사회는 자신이 죽은 뒤 70년간 존속했던 사회주의 사회와는 크게 달랐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녀를 죽인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었다. 그녀를 죽인 것은 군부와 결탁해 정권을 장악한 사민당 우파였다. 전쟁에 찬성하고 군부와 결탁한 사민당 우파는 여전히 자신을 사회민주주의자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1919년 상황에선 독일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도 사회민주주의자였고, 그가 살해한 로자 룩셈부르크도 사회민주주의자였고, 그녀가 비판한 레닌도 사회민주주의자였다. 그 세 사회민주주의의 내실은 전혀 달랐는데도 말이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자유'의 한계라면, 나는 잠재적 로자주의자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충실한 로자주의자는 못될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이 이상주의자이며 이상주의자로 남고 싶다고 되뇌었지만, 나는 현실주의자이며 현실주의자로 남고 싶기 때문이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2> 최진실-21세기의 제망매(祭亡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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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 입력 2009.01.19
일면식도 없었는데… 내 가족이고 내 안쓰러운 누이로 남은 그녀 그녀는 '만인의 연인'이라기보다는 '만인의 누이' 대중스타는 변덕스런 대중의 한시적 소모품이라지만… 고작 일부 대중의 적의에 허망하게 무너진게 밉다
2008년 내 일상의 평정을 가장 사납게 무너뜨린 것은 최진실의 죽음이었다. 그 죽음은 내 삶의 지침인 '안심입명'이나 '처변불경' 같은 말을 탄지지간에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별일이었다. 지난해 삶을 버린 연예인이 최진실만은 아니었고, 평소 '배우 최진실'한테 홀딱 반해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 해에는 또 홍성원, 박경리, 이청준 같은 한국 산문문학의 대가들이 타계했다. 이 죽음들이 남긴 자국은 내 마음에서 이내 희미해졌다. 가령 이청준의 죽음은, 아릿한 슬픔과 함께, 이제 한국문학의 한 시대가 막을 내렸구나, 하는 소회를 남겼으나, 내 마음을 거칠게 샐그러뜨리진 않았다.
지난해 대한민국의 대사(大事)는 이런저런 개인들의 죽음이 아니었다. 진짜 큰일은 제6공화국의 지난 20년 개혁에 맞선 이명박식 반동개혁이었고, 그 반동개혁에 맞서는 시민저항이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학교의 병영화-서열화, 방송 독차지하기에 반대하는 촛불시위로 수만의 서울시민들이 한 철의 밤을 밝히고 또 밝혔다.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망언과 망동으로 국민을 웃기고 울리고 화나게 하며, 희비극 연예인들의 밥줄을 위협했다.
이런 반동개혁과 시민저항의 소란 속에서도 나는 그럭저럭 내 나름의 안심입명을 실천할 수 있었다. 지난 대선 이후 정치에 대한 냉소가 내 마음을 얽어매고 있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진보진영의 분열과 부진도 학습된 내 심란함을 그저 지속시켰을 뿐, 내 평정을 뒤흔들지 못했다. 나는 시대의 방관자였다.
작업실이 있는 '명박산성' 근처에서 촛불집회를 관찰하던 내 마음의 종종걸음은 내가 미리 그려놓은 동그라미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 최진실이 죽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은 단박 내 마음의 파동을 동그라미 밖으로 내몰았다. 가장 가까웠던 이가 죽기라도 한 듯, 내 가슴에 둥그런 구멍 하나가 뚫렸다.
최진실이 삶을 버린 날부터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광화문의 작업실에서, 또는 명륜동이나 신촌의 카페에서 술을 마시며 그녀를, 그녀의 죽음을 생각했다. 그 충격이 어느 정도 가신 것은 그보다 한 달여 뒤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했을 때였다. 오바마가 나를 최진실로부터 끌어냈다.
나는 사적으로 전혀 모르는 외국 정치인의 기념비적 승리에 환호작약하면서야, 역시 사적으로 전혀 몰랐던 여자의 죽음이 가져온 충격에서 얼마쯤 벗어날 수 있었다.
왜 하필 최진실의 죽음이 내게 상실감을 불러일으켰을까? 생전의 그녀와 일면식도 없는데 말이다. 아니 일면식도 없다는 말은 옳지 않겠다. 텔레비전이나 영화관 화면에서 익히 그녀를 보았으니까. 오디오-비주얼 세계에서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경계는 흐릿하다.
우리는 어지간한 친분이 있는 지인만큼이나 유명 연예인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대중매체가 그들의 무대뿐 아니라 무대 뒤까지 카메라를 들이대기 때문이다. 대중매체는 연예인들에게 아름다운 허구를 만들어주는 대가로, 그들을 발가벗겨 누추한 현실을 드러낸다.
연예인이라고 불리는 대중예술가들은 결코 신비하지 않다. 우리는 대중매체라는 유리벽을 통해서, 실제의, 또는 연출된 그들의 사생활을 살핀다. 그것은 연예인들이 싫어하는 듯하면서 좋아하는 일이다.
자살이라는 죽음의 특별한 방식 때문에 내가 얼이 빠진 것일까? 그런 것만은 아니다. 최근 몇 년간 신문지면을 탔던 유명인의 자살들을 나는 덤덤히 스쳐 넘겼으니까. 그러면 최진실은 내게 다른 자살자들과 어떻게 달랐을까?
곰곰 생각 끝에 나는 그 다름을 찾아냈다. 최진실은, 다른 자살자들과 달리, 내 가족이었다. 내 안쓰러운 누이였다. 그녀는 '만인의 연인'이었다기보다 '만인의 누이'였다.
최진실의 첫 메인 모델 작품인 VTR 광고가 떠오른다. 남편이 퇴근해 돌아오자마자 아내에게 축구경기를 녹화해놓았느냐 묻자, 아내가 살짝 토라져 "나보다 축구가 더 좋다는 거죠?" 라고 항변한다. 남편은 쩔쩔매며 사과하고, 시청자를 향해 아내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한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
그 광고 속의 최진실은 단번에 대중을 사로잡았다. 파릇한 나이의 그녀가 행복에 겨워하며 상큼하고 야무진 새댁 역할을 하는 그 광고 덕분에, 그 전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최진실은 웬만한 TV드라마 주인공 못지않은 대중 스타가 됐다.
이후 최진실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영화에서도 큰 역들을 맡았다. 그런데 그녀는 번번이 누군가의 가족으로 등장했다. 그녀는 누군가의 아내이거나 언니이거나 엄마이거나 처형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연인의 얼굴이 아니라 가족의 얼굴이었다.
한 해외입양아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아, 그 낯선 스웨덴어 대사를 어떻게 다 외웠을까? 더빙이었을까?)에서 최진실이 맡았던 역도 우리가 지켜주지 못해 대하기 계면쩍은, 가련한 딸이자 누이였다. 성장기의 가난 탓에 수제비를 하도 먹어 '최수제비'라는 별명을 지녔었다는 일화도 그녀와의 가족적 친밀감을 짙푸르게 만들었다.
최진실은 물론 미인이었다.(거듭되는 이 과거형 시제가 내 마음을 후벼판다!) 그러나 그녀의 미모는 평범하고 살가운 미모였다. 그것은 강수연이나 이영애의 강렬하고 차가운 미모와 달리,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아리따움이었다.
최진실에게도 물론 성적 소구력이 있었으나, 그 소구력을 전도연이나 이효리의 것과 비교할 순 없었다. 요컨대 최진실은 여염집 여자였다. 살림하는 여자였다. '국민요정' 최진실은 살림하는 요정이었던 것이다.
화장품회사 사장이든 전자제품회사 회장이든 아파트 건설업자이든, 최진실과 광고로 이어졌던 자본가들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를 상품미학의 한 톱니바퀴로 만든 이 자본주의체제를 나는 어쩔 수 없이 지지한다.
그것이 인간의 비천한 심성에 가장 들어맞는 체제이므로. 나는 최진실이 나온 드라마나 영화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흔히 과장된 비장함이나 비윤리적 희극성, 비현실성에 감염돼 있었다. 그러나 그 영화들과 드라마들에 나온 최진실이라는 누이를 나는 은근히 좋아했다.
그녀가 이혼했을 때, 나는 심란했다. 하지만, 또순이 같은 누이니, 어떻게든 헤쳐나가리라 여겼다. 그녀의 실제 삶과 슬쩍 겹쳐 보였던 텔레비전 드라마 '장밋빛 인생'을 두고 최진실은 이리 말했다.
"이혼을 하면서 배우로서 끝났구나 생각했다. 재기불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이 이대로 끝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했다. 우선 배우로서 자존심을 버렸다. 스타라는 자부심을 버리고 오로지 연기로서 승부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운 좋게 재기할 수 있었다."
톡 튀어나온 그 작은 이마 속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들끓었을까. '자존심을 버리고'! 혹시라도 '불후의 걸작'이 그녀에게 있었으면, 그녀는 배우로서, 한 인간으로서 결코 허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자존심이 그녀를 지켜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예술에서 '불후의 명작'은 만나기 쉽지 않다. 그러니 대중스타의 자존심이란 피상적이고 허약하기 십상이다. 대중스타는 변덕스런 대중의 한시적 소모품이고, 그래서 그의 자존심은 언제 찢어질지 모를 종이처럼 아슬아슬하다.
그녀가 삶을 버렸을 때 나는 그녀가 미웠다. 한편으론 삶을 버티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헤아려보면서도, 어린 자식들을 둔 어미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그녀에게는 돈과 명성과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아직은 젊고 아리따웠다. 아무 능력 없이 가난 속으로 팽개쳐진 홀어미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인터넷에서 마주친 최진실의 말들은 가슴 시리다. "아이들을 보면 용기와 희망을 얻었다가도, 방에 들어와 혼자 있으면 다시 절망에 빠지는 과정이 반복됐다."
제 삶을 당사자만큼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났다.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생겨난 삶을 제 뜻대로 처리하는 것은 자유인의 권리다. 최진실의 자살이 미웠던 건, 그 자살이 그녀가 진짜 원했던 바가 아니었으리라는 어림짐작 때문이다.
두 아이를 그렇게 아꼈던 여자가, 칡넝쿨 같은 생명력을 지녔던 여자가, 긴 생각 끝에 그런 결정에 이를 수는 없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홧김에 죽음의 세계로 건너간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밉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억척스러워 보였던 그녀가 고작 일부 대중의 적의(敵意) 따위에 허망하게 무너진 게 밉다.
한 번도 마음껏 어리광을 부려보지 못했을 우리의 막내누이 최진실. 웬디인 줄로만 알았던, 그러나 팅커벨이기도 했던 진실이. 사랑스러웠던, 내 안타까운 누이 최진실(1968.12.24~ 2008.10.2).
객워논설위원 aromachi@hk.co.kr
[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3> 제인 마플 - 마을의 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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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 입력 2009.02.02
남자보다 지적능력 떨어진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은 읽어보셨는지 그녀가 만들어낸 걸작들… 아마추어 명탐정 '미스 마플' 라이벌 에르퀼 푸아로보다 앞서 사건 본질을 파악하는 집중력, 마음 읽기는 감성영역뿐아니라 고도의 지성 영역이기도…


'알파걸'이니 '오메가보이'니 하는 말이 유행을 타고 있는 요즘엔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역사 이래 여성 호모사피엔스의 평균적 지성은 남성 호모사피엔스의 평균적 지성보다 뒤처지는 것으로 간주됐다. 호모사피엔스의 지성사를 채우고 있는 개체들 대부분이 남성이라는 점이 이런 가정을 그럴 듯하게 뒷받침했다.
교육을 받을 기회가 남녀 사이에 매우 불평등했다는 사실은 고려되지 않았다. 심지어 몇 년 전에도, 로렌스 서머스라나 뭐라나 하는 하버드대 총장(최근 오바마의 백악관에서도 한 자리 꿰어찬 모양이다)이 여성의 상대적 지성 결여를 입에 담아 스스로 구설에 올랐다.
사실 하버드대 총장의 '부드러운' 메일 쇼비니즘은, 겉으로 입에 올리지 않을 뿐이지 많은 남자들이 속으로 공유하고 있는 편견이다. 그들은 지성의 전(全) 분야에서는 몰라도, 논리학과 수학 언저리의 자연과학적 자질에서만은 자신들이 여성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여긴다.
그나마 언어를 익히는 능력에 대해선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평가가 상대적으로 너그럽다. 이 너그러움이 우스운 것은,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는 어휘와 규칙을 외우는 기억력만이 아니라, 그 수많은 규칙들을 배열하고 조합하는 논리적 수학적 능력이 적잖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지성의 성적(性的) 불균등에 대한 논란은, 지성의 인종적 불균등 논란과 함께, 정치적 좌우를 가르는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했다. 10여 년 전이었던 것 같은데, 미국의 리처드 헌스틴과 찰스 머리라는 '과학자'가 < 벨 커브 > (Bell Curve)라는 책에서 지성의 인종적 차이를 과감히 주장한 적 있다.
그들에 따르면 인종들의 지성 순위는 아슈케나지(중동부유럽 출신 유대인), 동아시아인, 백인(코카시언), 흑인이라는 것이다. 참, '한가한 과학자'들이시다.
인종은 이 글의 관심 대상이 아니니 성에 대해서만 얘기하자. 여성은 과연 지적으로 남성에게 뒤떨어지는가? 최근 한국의 '교육 시장'에선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점점 또렷이 드러나고 있다.
특목고(의 사회적 폐해나 교육적 비윤리성은 잠깐 잊어버리자)나 소위 명문대학 입학생들 가운덴 여성의 숫자가 남성을 근소한 차이로 따라붙거나 넘어서고 있다.
사법시험을 비롯한 만만찮은 자격시험이나 행정고시를 비롯한 고급공무원 시험에서도 그렇다. 여성 지원자들은 남성 지원자들과 합격률이 거의 대등할 뿐 아니라, 학업성취(성적)도 눈에 띄게 앞선다.
이런 시험들에 꼭 들어가는 과목이 미분기하학이나 양자역학이 아니고 법학이어서 그렇다고 주장하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즉 법학은 그저 외기만 하면 되는, 비-창조적 암기과목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모든 학문이 그렇듯, 법학도 암기력을 요구한다. 그 한편, 법학은 형식논리학의 맏아들이기도 하다. 그러니 여성이 논리 능력에서 남성에게 뒤진다는 것은 거짓말이기 쉽다.
반면 경제형편이 나은 집 아이들이 못한 집 아이들보다 교육성취도가 높다는 사실은 수없이 증명되었다. 그러니까 다른 조건이 동일할 경우, 지적 성취도를 좌우하는 것은 성이 아니라 계급이라고 보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그것은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를 비롯한 여러 관찰자들이 이미 지적했던 바다. 계급은 교육제도를 매개로 재생산된다.
나는 지적 능력이 성에 따라 다른지 여부를 판단하진 않겠다. 어쩌면 공식 역사가 보여주듯, 남성이 본디 더 지적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최근의 알파걸 열풍에서 보듯, 다른 조건이 같다면 여성의 지적 성취도가 더 높을지도 모른다.
이런 논의는 본디 확정적 결론에 이를 수 없다. 그야말로 "It depends"(그 때 그 때 달라요)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이 자리에서 나를 매혹한 지적 여자 한 사람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그 여자의 이름은 제인 마플이다.
나는 그녀의 생년도 몰년도 모른다. 아는 것은 그녀가 잉글랜드의 세인트메리미드라는 곳에 살았던, 나이 지긋한 독신녀였다는 것뿐이다. 현실 속에서가 아니라 픽션 속에서. 일반 독자들에게 '미스 마플'로 더 잘 알려져 있을 그녀는 아마 작고했을 것이다.
그녀가 아마추어 탐정으로 맹활약을 한 것이 1930년부터 1971년까지니 말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애거사 크리스티라는 추리소설가다.
맞다, 바로 그 미스 마플. 내가 지금 들추고 있는 사람은 벨기에 출신의 사립탐정 에르퀼 푸아로와 함께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주도했던 그 제인 마플이다. 그녀는 크리스티의 장편 12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첫 작품이 < 목사관의 살인사건 > (1930)이고, 마지막 작품이 < 네메시스 > (1971)다. 그러나 미스 마플이 독자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76년에 나온 < 잠자는 살인 > 에서다. 크리스티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쓴 이 소설을 은행금고 속에 보관해 두었다.
독일군의 영국 공습이 일상적이었던 터라, 혹시라도 자신이 이 전쟁을 넘기지 못할까 염려했던 것이다. 그것이 크리스티가 작고한 해에 출간되었다. 미스 마플은 크리스티의 단편에도 나온다. 마플이 등장하는 단편만을 모은 < 열세가지 문제 > (1932)라는 창작집도 있다.
나는 아마, 단편을 빼고는,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대부분을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스토리가 머리에 또렷이 남아있는 것은 < 쥐덫 > 이나 < 카리비아해의 미스터리 > 를 포함해 얼마 되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점점 나빠지는 것의 이점 하나는,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어도 여전히 처음 읽는 듯 흥미롭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에게 정보를 전하는 데는 그것이 치명적 약점이다. 그러나 나는 제인 마플이 크리스티 작품 속의 라이벌인 에르퀼 푸아로와 많이 달랐다는 점은 기억하고 있다.
여자라는 점 말고도 말이다. 가장 큰 차이는 푸아로가 주로 이성의 연산에 바탕을 두고 사건의 진상을 밝혀나가는 데 비해, 미스 마플은 이성과 경험을 버무리면서 사건을 파헤친다는 점일 테다. 미스 마플은, 추리만이 아니라, 자신의 희미한 기억 속 어떤 사건과의 아날로지를 통해 새로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친다.
두 사람 다 사건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휘말리는 수동적 탐정이지만, 그 '귀차니즘'에서 미스 마플은 에르퀼 푸아로를 앞선다. 마플은 움직이기 싫어하고 생각하기 좋아한다.
초기의 마플은 남의 일에 간섭하기 좋아하는 수다쟁이 할머니(아주머니?)였다. 말하자면 좀 주책이 없었다. 그러나 크리스티 소설 속에 그녀가 거푸 등장하면서, 그녀의 인격은 다사롭고 격조있게 변한다.
다시 말해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좀 더 살가워지고, 말에 조심스러워진다. 무엇보다도, 전기(前期) 마플과 후기(後期) 마플을 통틀어서, 사건 관련자들의 마음을 읽어냄으로써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마음 읽기는 감성만이 아니라 지성의 영역이기도 하다)은 마플이 푸아로를 앞선다.
머리에 넣고 있는 정보가 지성의 척도라면, 아무 때나 프랑스어나 영어로 고전의 이 대목 저 대목을 인용할 수 있는 푸아로에게 시골 할머니가 대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태를 면밀히 관찰하고 편견에 휘둘리지 않으며 논리의 회로를 따라가는 것이 지성이라면, 마플은 푸아로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게다가 마플은 해부학을 비롯한 의학 약학 지식에서도 푸아로를 앞선다.
두 사람이 닮은 점이 있다. 쉽게 사람을 믿지 않는 것,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너무 쉽게 발견하는 것. 그러나 바로 그것이 위대한 탐정들의 자질일 것이다. 더구나 마플은, 그 타고난 염세주의 속에서도 주변의 몇몇 사람에 대한 애정을 견지한다.
이 너그러운 비관주의자의 스토리는 거듭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돼 관객을 만났고, 마거릿 러더퍼드와 앤젤라 랜즈베리를 비롯한 많은 배우들이 미스 마플 역을 제 경력에 추가했다.
아마추어 탐정 노릇 말고 마플의 유일한 취미가 뜨개질이라는 사실이 재미있다. 그녀는 노처녀(spinster)인데, 이 말의 본디 뜻은 '실 잣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티가 그걸 의식하고 마플의 취미를 결정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얘기해온 제인 마플의 지성은 바로 크리스티의 지성이었다.
크리스티 팬들의 주장에 따르면, 크리스티의 책들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혔다고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비슷한 주장이 크리스티의 팬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1위는 요지부동으로 성경이지만, 2위 자리가 흔히 변한다. 심지어 마르크스도 크리스티의 경쟁자다.
추리소설은 가장 지적인 소설장르다. 그리고 역사상 가장 널리 읽힌 추리소설 작가는, 그리고 그녀가 아마도 자신을 투사해 만든 캐릭터는 '여자'다. 자신이 여자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덜떨어진 사내들은 늘 이 점을 가슴에 새겨야 할 테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4>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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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 입력 2009.02.09
1000년도 전에… 어쩌면 최초의 소설가일지 모르는 무라사키 부인을 위해 프랑스 로베르 라퐁 출판사의 < 여성 저명인사 사전 > (1992)에서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 대략 974~1014)를 찾아보니 생애가 60여 행으로 압축돼 있다. 1951년 이전에 태어난 여성 3,000명 가량의 생애를 932면에 담고 있는 이 사전으로선 그리 박한 대우가 아니다.
편저자가 더 너그러웠다 해도 더 길게 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무라사키 부인의 생애가 그리 상세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고로, 역시 그 생애가 자세히 밝혀지지 않은 그리스 시인 사포(기원전 620~기원전 565)도 무라사키와 비슷한 분량을 배당 받았다. 말하자면 무라사키는 이 사전에 이름을 올린 여성 저명인사들의 평균보다 사뭇 나은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 새 저자 사전 > (1994)은 무라사키에게 고작 한 페이지를 내 주었다. 글줄이나 썼다는 고금동서의 선남선녀(김부식, 김만중, 김소월, 김동인, 김수영 같은 한국 문인들도 보인다)들 가운데 1951년 이전에 태어난 이들의 생애를 세 권에 모은 이 사전은 무라사키에게 앞의 사전보다 배려를 덜 한 듯싶다.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작가도 때론 서너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적잖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무라사키를 무시했다기보다, 그녀의 생애에 대한 정보가 모자랐기 때문이라고 봐줄 수도 있겠다.
그런데 같은 출판사의 6권짜리 < 새 작품 사전 > (1994)이 < 겐지 이야기 > (겐지모노가타리: 源氏物語)에 고작 한 페이지 반 정도밖에 내주지 않은 것은 뜻밖이다. 그 문헌학적 가치나 예술적 됨됨이에서 < 겐지 이야기 > 에 훨씬 못 미치는 작품들도 이 사전의 두세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예사이기에 하는 말이다. 이것은 정보 부족 탓으로 돌릴 수도 없다.
< 겐지 이야기 > 는 현대 일본어로 뿐만이 아니라 프랑스어와 영어를 비롯한 몇몇 유럽어와 한국어(2007)로도 완역되었고, 이 작품에 대한 연구도 두툼히 쌓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 애호'가 널리 퍼진 나라에서 나온 사전이 < 겐지 이야기 > 를 이리 푸대접한 게 놀랍다. 편집자들의 게으름이나 '대항 편견'의 소산이 아닌가 짐작된다.
< 겐지 이야기 > 의 저자 무라사키 시키부는 교토의 소귀족(小貴族) 가문(후지와라 가[家] 일파)에서 태어났다. '무라사키 시부키'는 그녀의 본명이 아니다. 몇몇 연구자들은 그녀의 본명이 후지와라 다카코였으리라 짐작하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헤이안 시대 일본에서 부부는 별거하는 것이 관례였고 아이는 모계 쪽 가족 틈에서 자랐다. 그러나 무라사키는 유년기에 어머니를 여읜 탓에 아버지 밑에서 컸다. 교양 있는 궁중관료였던 그녀의 아버지 후지와라 노 다메토키는 딸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그래서 당시의 관행과 달리 딸에게 고전 한문교육을 시켰다.
무라사키의 20대 삶은 순탄치 않았다. 스무살 차이 나는 남편(그녀의 사촌이었다)의 바람기(라는 개념이 헤이안 시대 일본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전처 자식들과의 갈등으로 삶의 고뇌가 깊었다.
스물 서너 살에 과부가 되었는데, 이것이 외려 그녀의 삶에는 약이 되었다. 청상과부이자 궁인으로서 그녀는 당대 궁정생활을 관찰하며 자신의 교양 속에서 문학적 상상력을 길어 올렸다.
무려 54책, 3부로 이뤄진 < 겐지 이야기 > 는 무라사키 문학의 순금 부분이다. < 겐지 이야기 > 는 히카루 겐지(光源氏)라는 황자(皇子)와 그 주위 사람들의 4대 70년에 걸친 일상을 일종의 불교철학적 배경 위에서 묘사한 이야기다.
1004년 쯤에 탈고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애심리와 삶의 번뇌를 뛰어나게 묘사하고 있는 < 겐지 이야기 > 는 문학적 가치 못지않은 역사학적 가치를 지닌 세태ㆍ심리소설이다.
무라사키는 당초 이 이야기를 궁중의 귀족 여성들에게 읽히려 썼다. 500명 안팎의 등장인물들이 나오는데도, 그들 각자에게 거의 이름이 없다는 것이 눈에 띈다. 헤이안 시대엔 남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결례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은 신분이나 계급, 의상, 친인척 관계 등으로 불린다.
무라사키는 1014년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년이 그렇듯 몰년도 정확하지는 않다. < 겐지 이야기 > 외에 <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 > < 무라사키 시키부집(集) 등을 유고로 남겼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일본 문학사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작가로서, 많은 유럽인들을 매혹했다. 몇몇 유럽 작가들은 그녀의 생애를 소설화했다. 그 가운데 하나는 < 1000번의 가을, 궁인 무라사키 부인의 삶 > 이라는 낭만적 제목을 지녔다. 이탈리아 작가 가브리엘라 마그리니가 쓴 이 전기소설은 프랑스어 번역판에서 < 교토부인 > 이라는 제목을 얻었다.
무라사키와 < 겐지 이야기 > 는 왜 중요한가? 관점에 따라서 < 겐지 이야기 > 를 역사상 최초의 소설로, 다시 말해 무라사키 부인을 최초의 소설가로 볼 여지가 넓기 때문이다. 물론 적지 않은 문학사가들은 이를 부인한다. < 겐지 이야기 > 는 '이야기'일 뿐이지 '소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플롯이라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 겐지 이야기 > 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은, 실제의 삶에서처럼, 그저 세월에 따라 늙어갈 뿐이다. 이런 '약점'을 지적하는 유럽인들은 소설의 기원을 프랑수아 라블레나 세르반테스 같은 16세기 유럽인의 작품에서 찾는다.
그러나 소설과 이야기의 구분은 매우 작위적이다. 우리가 '이야기'라고 부르는 신화들도 흔히 플롯을 갖추고 있다. 또 20세기의 이런저런 아방가르드 소설들에는 플롯 자체가 없다. 아니, 20세기 소설만이 아니다. 그들이 고전으로 치는 18세기 유럽소설들 가운데도, 그들의 눈에 '소설'이 아니라 '이야기'로 비칠 작품들이 많이 있다.
이를테면 한국어로도 번역된 로렌스 스턴의 < 트리스트럼 섄디의 삶과 견해 > 같은 작품에 < 겐지 이야기 > 을 넘어서는 플롯이랄 만한 것이 있는가?
< 겐지 이야기 > 에 최초의 소설 자리를 주지 않으려는 인색함은, "모든 (근대적인) 것의 효시는 유럽에서 생겨났다"고 여기는 유럽중심주의의 한 증상인 듯하다.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 리오리엔트 > 를 읽은 독자라면, 이 유럽중심주의가 얼마나 거짓스러운지를 잘 알 것이다.
프랑크의 지루한 동서 경제비교를 거론할 것도 없이, 사실은 우리가 잘 아는 바 '근대적'인 것들은 거의 동아시아에서 처음 나왔다. 화약이 그렇고 나침반이 그렇고 종이가 그렇고 금속활자가 그렇다.
무라사키 부인은 < 겐지 이야기 > 에서 세심하게 성격(인물)들을 창조하고 배열했다. 그리고 전편을 통틀어서 그 성격들에 일관성을 부여했다. 이것이야말로 (근대)소설의 특징 아닌가?
< 겐지 이야기 > 가 설령 소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 작품의 가치를 깎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언어학자들과 역사학자들에게 < 겐지 이야기 > 는 자료의 화수분이다. 언어학자들은 < 겐지 이야기 > 를 통해 현대 일본어보다 훨씬 더 복잡한 문법을 지닌 헤이안시대의 일본어를 천착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특히 미시사 연구자들은(소설가들도 마찬가진데), '비 오는 날의 여인 품평회'나 '로쿠조인(六條院: 히카루 겐지의 대저택. 네 계절에 따라 공간배치를 달리했다)에서의 사랑' 같은 1000년 전 교토 주변의 세태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 중세의 사계(四季)에도 일본인들은 지금의 우리들처럼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설워하고 고뇌했던 것이다.
세상에서 일본인들을 우습게 아는 국민은 한국인밖에 없다는 우스개가 있다. 거기 일말의 진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 옛날 삼국시대에 중국의 선진문물을 일본에 전해주었다는 사실 하나에 어쭙잖은 자부심을 드러내며, 일본 문화를 우습게 아는 것이다. 즉 '경제일본'은 대단해도 '문화일본'은 대단찮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한국에는 많다.
그러나 일본인은 이미 1300년 전에, 제 언어를 섞어서, 제 역사를 기록했던 민족이다( < 고사기(古事記) > ). 그리고 이미 1000년 전에 중국 고전언어(한문)가 아니라 자신들의 언어로 세상의 자잘한 이야기(小說: 연애나 결혼관, 패션, 놀이, 화장)를 기록했던 민족이다( < 겐지 이야기 > ).
일본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한국을 앞서기 시작한 것이 메이지유신 이후부터라 보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신화다. 시문학과 공연예술에서도, '전통 일본'은 '전통 한국'을 앞섰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전통 중국'에 비할 수야 없겠으나.
나는 그것이 크게 애석하지 않다. 나는 한국인이면서 동아시아인이면서 호모사피엔스니까. 팔만대장경이나 훈민정음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수많은 고전 한시들도, 고대 그리스ㆍ로마의 유적들도 < 겐지 이야기 > 처럼 결국은 내 조상의 손길에서 나온 것이니까. 우리는 모두 한국인이면서 일본인이면서 중국인이면서 그리스인이니까. 고마워요, 경애하는 무라사키 부인!
객원논설위원
[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5> 오리아나 팔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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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 입력 2009.02.16
'펜을 쥔 여전사'로 불린, 누구에게도 제압당하지 않은 인터뷰어 키신저·달라이 라마·숀 코너리… 거물급 인사들 꼼짝 못하게한 재간 시대의 큰 반향 남긴 인터뷰 수두룩
몇 해 전 돌아간 미국인 역사학자 대니얼 부어스틴은 대중매체의 인터뷰를 '기사화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유사사건(pseudo-event)'의 하나로 여겼다. 이 인터뷰라는 유사사건은 갑자기 터지는 것이 아니라, 인터뷰어(기자)와 인터뷰이(취재원)의 합의에 따라 미리 짜인다.


좋은 인터뷰 기사에는 인터뷰이의 의견만이 아니라 인터뷰어의 인격, 시각, 지식 따위가 함께 버무려져 있다. 다시 말해 거기선 두 인격과 세계관이 맞부딪치며 긴장의 불꽃이 튄다.
그것은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관계가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마찬가지다. 그 점이 인터뷰 기사의 매력이다. 좋은 인터뷰어는 인터뷰이가 알리고 싶어하는 사실만이 아니라, 독자(인터뷰어를 포함한)가 알고 싶은 사실을 인터뷰이로부터 끌어낸다.
인터뷰이의 의견을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다면, 매체는 인터뷰를 하는 대신 인터뷰이의 원고를 받아 지면에 실으면 그만이다.
모든 글이 그렇듯, 좋은 인터뷰 기사를 쓰는 일은 어렵다. 기자가 인터뷰이의 위세에 눌려 묻고 싶은 것을 못 묻고 상대가 바라는 질문만을 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위세만이 아니라 상호 감정도 개입한다. 인터뷰이에게 호감을 지닌 인터뷰어가 던지는 질문은 인터뷰이에게 악감을 지닌 인터뷰어가 던지는 질문과 많이 다를 것이다.
솜씨 좋은, 그리고 어떤 명확한 의도를 지닌 인터뷰어는 인터뷰이가 특정한(인터뷰어가 바라는) 발언을 하지 않을 수 없게끔 대화를 한 편으로 몰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떨 땐, 그것이 좋은 인터뷰 기사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의도가 공익에 부합한다면 말이다.
물론 어떤 의도가 공익에 부합하느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것은 인터뷰어의 주관이다. 어차피 '완전히 객관적인' 기사란 있을 수 없다. 기사들은, 사설이나 칼럼 같은 의견기사가 아닌 스트레이트 기사일지라도, 어떤 사건의 한 면을 다른 면보다 더 부각시키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스트레이트 기사에서도 기자의 주관은 개입한다. 독자로서는 기자의 주관이 자신의 주관과 서로 어긋나지 않는 공익의 지평에 가로놓여 있기를 바랄 수 있을 따름이다.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오리아나 팔라치(1929~2006)는 한 시대를 주름잡은 인터뷰 전문 기자였다. 인터뷰 기사의 가치를 결정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는 인터뷰이의 명성이다. 그 점에서 팔라치는 동시대 어떤 기자보다도 재간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국제적 명성을 지닌 사람들과 마주앉을 기회를 자주 만들어냈다. 그 가운데는 정치인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헨리 키신저, 빌리 브란트, 무아마르 알 가다피, 야세르 아라파트, 인디라 간디, 구엔 반 티우, 골다 메이어, 줄피카르 알리 부토, 이란의 팔레비 국왕과 그의 최대 정적 아야톨라 호메이니, 레흐 바웬사 같은 이들이 그들이었다. 거기에 더해 달라이 라마, 영화배우 숀 코너리, 텔레비전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 같은 인물도 팔라치의 인터뷰이였다.
누구와 인터뷰를 할 때든, 오리아나 팔라치는 취재원에게 제압당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인터뷰를 주도했고,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을 물었다. 그래서 종종 이런 거물들의 적이 되기도 했다. 반면에 팔라치가 인터뷰이에게 반한 경우도 있었다. 1970년대 초에 만난 그리스의 반(反)독재 투사 알렉산드로스 파나굴리스가 그 사람이었다.
파나굴리스는 군인-독재자 파파도풀로스를 살해하려 했다는 혐의로 투옥되어 끔찍한 고문을 당한 뒤 막 풀려난 참이었다. 팔라치는 첫눈에 파나굴리스에게 반했고, 파나굴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내 연인이 되었고, 사실상의 부부가 되었다. 그리스에 민주주의가 회복된 뒤 파나굴리스는 국회의원이 되었고, 1976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
팔라치는 파나굴리스의 죽음에 '대령들'(쿠데타로 그리스를 거머쥐었던 군부세력)의 잔당이 관여돼 있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진상은 지금도 미궁 속에 있다. 팔라치와 파나굴리스의 불같은 사랑과 고난은 뒷날 팔라치가 쓴 장편소설 < 남자 > (Un Uomo)의 밑그림이 되었다.
담 큰 기자들의 꿈 하나는 전쟁을 취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쟁 전문기자가 될 사람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 같다. 그들에겐 용기만이 아니라, 체력과 민첩함과 객관적 시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전을 포함한 전쟁의 취재는 팔라치의 운명이었다.
그녀는 열 살을 조금 넘겨서부터 사람들이 사람들을 죽이는 광경을 일상적으로 지켜보았다. 소녀 오리아나는, 무솔리니의 정적 가운데 하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반파쇼 레지스탕스에 참여했다. 해방을 맞은 그녀는 10대의 나이로 기자 노릇과 학업을 병행했고, 30대 말부터는 분쟁지역 전문 기자가 되었다.
오리아나 팔라치는 베트남을, 인도-파키스탄 국경을, 중동을, 남아메리카를 누비며 전쟁의 기록자가 되었다. 1960년대 말에 인쇄매체 기자로서 전쟁을 취재하는 것은 그리 매력적인 일이 아니었다.
예컨대 그는 오늘날의 CNN 기자 크리스티안 아만푸르처럼 화면 속의 포연이 만들어주는 아우라를 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팔라치는 펜으로 아우라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전투 기사들은 파릇파릇한 생동감으로 현실과 이미지를 포갰다.
그녀가 관찰한 수많은 전쟁 가운데는 레바논 내전도 있다. "기자로 기억되기보다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고 되뇌던 팔라치가 그 경험을 소설화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그 소설의 제목은 아랍어로 '신의 뜻대로'라는 의미인 < 인샬라 > 였다. 이 작품은 헤밍웨이의 전쟁소설들에 비견될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고, 많이 팔려나갔다.
그러나 < 인샬라 > 는, 팔라치의 다른 책들이나 일부 기사들과 함께, 그녀에게 반-이슬람주의자 낙인을 찍는 데 한몫했다. 이 책 헌사에는 "신의 아들들이 자행한 베이루트 대학살에서 죽어간 400여 명의 미군과 프랑스군 병사들에게 이 소설을 바치고 싶다"라는 문장이 있다.
소설 자체가 이슬람 자살 테러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팔라치는 내전의 여러 '진영'을 비교적 공평하게 묘사한 이 소설에 너무 '인도적인' 애도의 헌사를 씀으로써 제 '진영'을 드러내고 말았다.
열 살 갓 넘어서부터 반-파쇼 저항운동에 참여했고, 키신저로부터 "베트남전쟁은 쓸데없는 전쟁이었다"라는 자백을 받아낸(팔라치는 끊임없이 베트남에 대해 묻고 키신저는 줄곧 베트남 얘기를 회피했던 이 인터뷰는 활자화된 뒤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닉슨은 10분마다 키신저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이 자유의 투사에게는, 아쉽게도 편견의 대상이 둘 있었다. 하나가 이슬람교였고, 또 하나가 멕시코였다.
그녀는 멕시코에 대해 공개적으로 혐오를 드러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직전 틀라텔로코 광장 학살을 취재하며 당한 테러가 그 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이슬람(테러리스트들만이 아니라 이슬람 자체)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지녔던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사적으로, 그녀는 이슬람교와 나쁜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정말 공적 차원에서 이슬람교를 자유와 평화의 적으로 생각했던 것일까?
그녀가 이슬람 '테러리스트'를 혐오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쪽 편의 테러리스트가 다른 쪽에서 보면 자유의 투사라는 것을 그녀는 정말 이해하지 못했던 것일까?
더구나 팔라치의 생전에도 일부 이슬람 테러단체는 미국 이상으로 아랍의 절대군주제와 대립하고 있었다. 인도 인류학자 아르준 아파두라이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 코란은 민간인에 대한 어떤 일반적 폭력도 허용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역사상 서로 전쟁 중인 종교들은 늘 관용을 모욕해왔다.
팔라치가 정말로 편견에 찬 반-이슬람주의자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생애 후반에 여러 차례 이슬람 단체들의 고소를 받았고, 인종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오리아나 팔라치는 강한 여자였다. 강함은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증오나 사랑 같은 감정과 결합하면 사태를 악화시키거나 크게 개선한다.
오리아나 팔라치의 강함은 양쪽과 다 연루돼 있었던 것 같다. 펜 하나로 독재자들을 희롱하고 모욕할 때 그녀의 강함은 선했다. 끝내 자신이 반-이슬람주의자가 아니라고 공언하지 못했을 때, 그의 강함은 바람직했던 것 같지 않다.
아니, 이것은 팔라치에 대한 모독이거나 오해일 수 있다. 그녀는 신념을 지닌 반-이슬람주의자였을 수도 있다. 그녀는 소수파인 여자이면서, 다수파인 유럽중심주의자, 서양우월론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완전히 반하지 못했다. 팔라치의 소설 < 남자 > 에서 '남자'는 그녀의 연인 파나굴리스다. 그러나 나는 왠지 그 남자가 오리아나 팔라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6> 마리 앙투아네트- 단두대의 장미
한국일보 | 입력 2009.02.23
프랑스 혁명의 대의 앞에 속절없이 스러져간, 法國의 중전을 위로하며…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어!" 그녀를 조롱하려 지어낸건 아닐까 사치와 허영의 왕비였을지 모르나 그런 말을 할 푼수는 아니였으리
로베스피에르 31세, 당통 29세, 생쥐스트 21세, 루이16세 35세, 마리-앙투아네트 34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9세.


프랑스대혁명을 점화시킨 바스티유 습격의 날(1789년 7월 14일), 이 혁명의 불길에 제 삶을 사를 운명이었던 사람들의 나이다. 세계사의 흐름을 뒤바꿔놓은 혁명의 주체와 그 대상들은 오늘날 한국으로 치면 소위 386세대보다 더 젊었다.
이들은 그로부터 4년 안에, 군인이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제외하곤, 모두 죽었다. 자연스럽게 죽은 게 아니라 모두 죽임을 당했다. 한 때의 제 신민(臣民)에게 살해되거나, 한 때의 제 동지에게 살해되었다.
그것도 격식을 갖춘 죽음을 맞은 것이 아니라, 단두대에 목을 들이밀고 머리와 몸의 분리를 겪어야 했다. 뒷날 혁명을 탈취해 황제가 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만이, 비록 대서양 외딴 섬에서 쓸쓸하게나마, 고종명했다. 그래봐야 50대였지만.
사실 이들은 모두 살인자들이었다. 루이16세 부부는 하필 흉년이 연이어 오던 시절 국가경영을 엉망으로 함으로써 수많은 신민을 굶겨 죽였다. 이 점과 관련해, '철없는' 왕비 마리-앙투아네트가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될 것 아냐!"(Qu'ils mangent de la brioche!)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널리 퍼져있다.
본디 출처가 어디인진 모르겠으나, 누군가가 그녀를 조롱하고 그녀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기 위해 과장하거나 지어낸 얘기가 아닌가 싶다. 마리-앙투아네트는, 총명한 여자는 아니었지만, 그런 말을 할 정도로 푼수덩이는 아니었다.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는 혁명의 이름으로 수많은 '시민들'을 단두대로 보냈다. 그들에게 죽은 사람은 국왕의 신민(sujets)이 아니라 공화국의 시민(citoyens)이었다. 그들 가운덴 한 때의 굳건한 혁명동지 당통도 있었다.
당통 역시, 이들만큼 과격하진 않았으나, 혁명정부의 법무부장관으로서 시민들의 불법 학살과 무질서를 수수방관했다. 그러나 이들이 죽인 사람 전부를 합해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죽인 사람 수엔 이르지 못할 것이다.
코르시카 출신의 이 키 작은 군인-황제는 프랑스혁명의 공화주의 이념을 제가 짓밟아놓고도, 혁명의 이념을 유럽 전체에 전파한다는 구실로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켜 수십만 유럽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들 펄펄 끓는 젊음이 이상주의 또는 복고주의와 결합해 온건함과 절제의 자리를 없애버린 것일까? 이 학살자들 가운데 가장 수동적이었던 사람은 마리-앙투아네트였다. 사실 그녀에게는 순진한 데가 있어서, 혁명이라는 것이 일어날지, 그 혁명에 자신과 왕족의 운명이 휘말릴지, 그리고 결국 그 혁명의 정점에서 자신이 단두대에 오를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리-앙투아네트는 열네 살에 어깨동갑인 프랑스 왕세자 루이-오귀스트(뒷날의 루이16세)와 결혼했다. 그 당시 왕족 사이의 결혼이 흔히 그렇듯 정략결혼이었다. 독일어식 이름으로 마리아 안토니아였던 마리-앙투아네트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부부의 막내딸이었다.
그녀 어머니는 유럽 최강국의 하나였던 오스트리아제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자였고, 아버지는 그 오스트리아제국을 핵심으로 삼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다. 그리고 프랑스 부르봉 왕가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유럽에서 가장 오랜 숙적이었다.
인척 관계로라도 두 집안을 맺어놓지 않으면,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몰랐다. 그래서 마리아 안토니아는 부모의 뜻에 따라 적국 왕자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과 함께 이름도 프랑스식으로 마리-앙투아네트가 되었다. 그녀만이 정략결혼을 한 게 아니다. 그 결혼 앞뒤로 그녀의 자매들도 외국 군주나 왕위계승자와 차례로 결혼했다.
마리-앙투아네트는 4년 동안 왕세자빈 노릇을 하다가, 시아버지 루이15세가 죽은 뒤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이 결혼은 처음부터 궁중 안팎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마리-앙투아네트가 오스트리아 여자라는 사실이었다. 결혼의 정략이 외려 그 결혼의 약점이 되었다.
궁중 안팎 사람들만이 아니라 일부 신민들도 마리-앙투아네트를 좋아하지 않았다. 시누이들은 등 뒤에서 그녀를 이름이나 직위로가 아니라 '오스트리아 여자'(오트리시엔)라고 불렀다. 나중에는 그녀를 심지어 '오트뤼시엔'이라 불렀는데, 이 말은 '타조'를 뜻하는 '오트뤼슈'와 암캐를 뜻하는 '시엔'을 합한 말이다.
사람들은 대개 마리-앙투아네트라는 이름에서 사치와 허영과 불륜과 아둔함을 떠올린다. 실제와 어긋나지 않는 연상이다. 그녀는 베르사유 궁전의 프티 트리아농을 아름답게 개조해 거주하면서 파티를 즐겼다.
그녀는 사치스러운 의상과 보석에 눈을 팔았고, 경마에도 손을 댔다. 확인할 수 없는 염문들이 끊임없이 그녀 둘레를 맴돌았다. 그러나 그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부부가 제 딸을 프랑스 왕세자에게 시집보낸 목적, 즉 오스트리아에 대한 프랑스의 우호적 태도는 만들어낼 수 없었다.
그녀는 정치에 거의 관여할 수 없었다. 관여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어려서부터 반(反) 오스트리아 교육을 받은 루이16세를 바꿔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루이16세를 뒤바꿔놓은 것은 혁명이었다. 부르봉가와 합스부르크가의 대결 구도를, 프랑스의 혁명 '폭도들'과 루이16세를 포함한 유럽 군주들의 대결로 바꿔놓은 것이다.
사실 루이16세가 혁명주체들에게 조금만 양보했다면, 그는 혁명세력의 지롱드파(온건파)와 합세해 프랑스에 입헌군주제를 수립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그것을 굴욕으로 받아들였고, 아내와 함께 오스트리아의 처가로 피신하다가 잡혀 '국사범'으로 투옥되었다.
프랑스인들은 자기들을 마다하고 적국으로 피신하려던 사람을 자기들의 절대군주로든 입헌군주로든 받들 수 없었다. 혁명의 분위기는 더욱 과격해졌고, 공포정치가 극으로 치닫던 1793년 국왕은 반역죄로 단두대에 목을 들이밀 수밖에 없었다.
왕비가 마찬가지 운명을 맞은 것은 그로부터 한 해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유럽의 군주들은 격앙할 수밖에 없었고, 대(對)프랑스 동맹은 더욱 견결해졌다.
프랑스혁명이, 비록 우여곡절을 겪긴 했으나 성공한 혁명이었으므로(무엇보다도 이 혁명은 인류사를 옥죄고 있던 신분제를 철폐했다), 우리는 이 혁명의 좋은 점만을 보려 한다. 그리고 마리-앙투아네트의 죽음도 그럴만하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프랑스혁명의 세계사적 의의를 인정하고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 이념을 존중한다. 그런데 그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피를 뿌려야 했을까? 그런 급진적 사회혁명 말고, 영국식의 점진적 정치혁명을 택할 수는 없었을까?
당대의 유럽 군주들이 제 나라로 프랑스혁명이 수입될까 두려워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792년 9월 학살의 예에서 보듯, 프랑스혁명은 피로써 피를 씻어낸 혁명이었다. 당시 마리-앙투아네트는 남편과 함께 파리 탕플 탑에 유폐돼 있었다.
9월 3일 살해된 사람들 가운데는 어려서 시집온 마리-앙투아네트가 친언니처럼 따랐던 랑발 공작부인이 있었는데, 파리 시민들은 공작부인의 머리를 창끝에 얹어 탕플 탑까지 운반한 뒤 왕비 거처의 창(窓) 앞에 전시했다. 마리-앙투아네트는 창에 꽂힌 랑발 부인의 머리를 직접 보지 못했으나, 나중에 그 얘기를 듣고 혼절을 했다 한다.
나는 지금 루이16세 부부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혁명 와중에 조국을, 자신의 신민을 배신하고 외국 군주에게 제 몸을 의탁하려 했던 군주 부부의 처신은 보기에 따라 사형감이다.
그러나 그것이 꼭 단두대여만 했을까? 국왕 부부에게만 다른 방식으로 죽는 특권을 베풀었어야 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나는 단두대를 생각할 때마다 프랑스혁명의 명예를 부정하고 싶어진다.
프랑스인들은 혁명기의 이 무시무시한 발명품(스코틀랜드인들의 발명품이라던가?)을 1981년 사형제가 폐지될 때까지 유지해 왔다. 200년 동안 프랑스에서는 군인을 제외한 수많은 사형수들이 처형의 순간 머리와 몸통의 분리를 겪었다.
처형방식의 강온이나 명예/불명예를 거론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울지 모른다. 그러나 참수형은 가장 모욕적이고 야만스런 방식의 처형이다. 나는 교살이나 총살이, 그리고 그 뒤에 발명된 가스실이 참수보다 덜 끔찍하다 여긴다.
그리고 국왕 부부를 꼭 죽여야 했을까? 종신형을 선고해 가둬놓거나, 이를테면 아메리카로 추방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민족주의에 깊이 물든 혁명기의 민중에게 마리-앙투아네트는 다른 무엇보다도 오스트리아 여자였고 반역자였다.
그리고 루이16세는 그 오스트리아 여자의 남편이었다. 프랑스혁명이 일깨운 민족주의는 외국인 적에 대한 관용의 여지를 줄였다. 혁명의 지도자들은 이 '반역자 부부'에 대한 군중의 민족주의적 증오를 관리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마리-앙투아네트의 목은 단두대에 올려졌다.
당시엔 혁명광장으로 불렸던 오늘날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공화주의자의 자부심을 잠시 접고, 끝내 이방인이었던 왕비의 한을 위로한다. 편히 쉬어요, 법국(法國)의 중전이여.
객원논설위원
[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7> 이화 - 성(性)의 공산주의
한국일보 | 입력 2009.03.02
"원하는 이 모두… " 가장 사적인 性마저 공유하는 혁명성이여 "짝사랑한 남자의 자살에 충격받아 '성적 공산주의자'가 되는 한 여자 性을 팔지 않고 무掃?나눠주는, 어쩌면 聖처녀였을지 모르는 그녀 커다란 슬픔과 동행하는 연민의 사랑"


메마른 산문을 서른 댓 무렵부터 '소설'이라 우기며 가끔 끼적거리게 되면서, 다른 사람 소설 읽기를 꺼리게 되었다. 쓰는 재주는 없어도 읽는 감각은 조금이나마 있다는 게 문제였다. 좋은 소설을 읽으면 질투가 나고, 시원치 않은 소설을 보면 욕을 하며 중간에 팽개치게 된다. 자연히 소설에 대해 글을 쓰는 일도 삼가게 되었다.
정말 감동하며 읽은 소설(최근 몇 년 동안엔 파스칼 키냐르의 < 은밀한 삶 > 이 그랬다)에 대해 좋은 소리를 하는 거야 거북할 것 없지만, 소설에 이르지 못한 소설을 두고 싫은 소리를 하는 게 영 께름칙한 것이다. 그럴 때면 당장 "제 소설이나 잘 쓰지" 하는 말이 귓전을 울린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엊그제 조해일의 < 겨울여자 > (솔ㆍ1991)를 읽었다. 말하기 께름하지만, < 겨울여자 > 는 하급대중소설이다. 콧대 높은 문학과지성사가 문을 열자마자 이 책을 냈다는 것(1976)이 기이할 정도다.
나는 여기서 '대중소설'이라는 말을 중립적 의미로 쓰고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에서 이문열에 이르기까지 일급 대중소설가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 겨울여자 > 는 그런 사람들의 작품이 아니다. 나는 지금 소설가 조해일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 소설 < 겨울여자 > 에 대해 말하고 있다.
조해일에 대해서라면, 일급 대중소설가라고, 심지어 이문열처럼 부분적으로는 본격소설가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 < 겨울여자 > 의 대중성은 격을 갖춘 대중성이 아니다. 그것은 조해일의 소설세계에서도 사뭇 낮은 자리를 차지한다.
사실 이 책을 대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76년 초판본(문학과지성사)을 나는 꽤 오래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읽어내지 못했다. 책을 산 것이 영화(1977)를 본 뒤였는데, 일반적 경우와 달리 원작이 영화만 못해 보였다. (내 기억이 옳다면 이 작품은 라디오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나는 그 책을 그냥 지니고만 있다가 몇 페이지 들추지 못한 채 잃어버렸다.
영화 스토리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해서 자신 있게 얘기할 순 없지만, 소설의 끝머리를 이루는 주인공 이화(伊花)의 야학활동이 영화에선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면 문학과지성사판과 솔출판사판의 내용이 사뭇 달라졌는지도 모르겠고.
이 소설이나 영화를 못 본 독자를 위해 < 겨울여자 > 얘기를 잠깐 하자. 소설 < 겨울여자 > 는 유이화라는 이름의 여주인공이 고3때부터 대학 졸업 몇 년 뒤까지 겪는 사건을 그리고 있다.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화의 성격과 행동은 일반적 성장소설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즉 보통의 성장소설에서는 주인공이 비순응주의에서 순응주의로 나가는 데 비해, 이 소설의 주인공 이화는 순응주의에서 비순응주의로 나아간다. 그 비순응주의의 핵심은 '성(性)의 고른 분배'다.
이화의 성장은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거의 다 남자들이다)과의 관계를 딛고 이뤄진다. 작품 들머리에 이화는 '사람 잡는 여자'로 나온다.
기이한 영적 운동에 의해 이화와 똑같은 꿈을 꾸기도 하는 민요섭은 망설임 끝에 용기를 내 이화를 끌어안았는데, 그녀가 극도의 혐오감과 수치심을 드러내자 스스로 제 목을 칼로 그어 자살한다. 그리고 사실상의 강간을 통해 이화에게 성을 가르쳐준 우석기는 군대에서 사고로 죽는다.
이화의 첫 성 경험에 대한 작가의 시각엔 이해할 만한 점이 있다. 옷을 입은 채 한 남자에게 안긴 걸 그리 수치스럽게 여겼던 여자가, 불과 한 해 뒤엔 백치라도 된 듯 남자에게 제 몸을 거리낌 없이 맡기는 것은, 민요섭의 자살이 이화에게 열어놓은 어떤 연민의 세계 덕분(탓?)일 테다. 거기까지는 그럼직하다.
그러나 작가는 우석기에게 학생운동권의 한 자리를 내줌으로써 아우라를 부여한다. 그가 이화에게 한 짓에 대한 윤리적 심문을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말을 통해 우석기의 사람됨을 매력적으로 만든다.
우석기의 죽음 이후, 이화의 수동적이었던 성격은 능동적으로 바뀐다. 그 능동성이란 주로 성적 능동성이다. 그녀는 성적(性的) 공산주의자가 된다. 그녀는 성의 사유를 혐오한다. 능력에 따라 (성적으로) 일하고 필요에 따라 (성적으로) 분배받는 성의 공유가 그녀의 삶이 방식이 되는 것이다.
그녀는 성적 능력이 뛰어나므로 언제나 성의 적극적 공급자가 된다. 그녀가 창녀가 아닌 것은 성을 팔지 않고, 무료로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우석기의 친구 오수환과 자고, 제 학교 교수 허민과 자고, 상층부르주아 출신 빈민운동가 김광준과 잔다.
그녀는 자신이 한국 남자 모두에게 속해있고 한국남자 누구에게도 속해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녀가 왜 자신의 잠재적 일시적 연인들을 한국 남자로 제한했는지 의문이다. 그녀의 성적 공산주의는 국제주의와 연결되지 않는다.
작가는 조심스레 등장인물들을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과 연결시키고 이화로 하여금 가족주의를 비판하게 함으로써 소설에 사회성을 불어넣으려 하지만, < 겨울여자 > 의 주제는 이화라는 여자 개인의 성적 공산주의에 머물 뿐이다.
그것은 이 소설이 유신이라는 정치적 야만기에 발표됐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점을 감안해도, 이 소설에 높은 점수를 줄 수는 없다.
이 소설의 실패는 내용의 실패만이 아니라 형식의 실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장의 연결은 아슬아슬하고, 사제간의 대화는 어색하며, 성적 공산주의자가 빈민운동가로 넘어가는 과정도 매끄럽지 않다.
'표4'('책 뒷표지의 바깥면'을 가리키는 출판계 용어)의 글이라는 것이 늘 그렇고 그런 것이긴 하나, < 겨울여자 > 도 내용 없는 상찬의 대상이다.
이청준은 "돈과 허영과 부박과 투기가 미덕처럼 경쟁하는 시대에 흰눈송이처럼 순결한 영원한 처녀, 흡사 18세기 북구(北歐)의 어느 소녀를 연상케 하는 이러한 여자가 과연 우리 주변에 아직도 있는가"라고 썼고, 신학자 서광선은 "여주인공 이화는 성처녀(聖處女)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녀의 사랑은 성적, 개인적인 한계를 넘어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찬 사랑이다"라고 적고 있다.
서광선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 겨울여자 > 에서 이화가 수행하는 사랑은 커다란 슬픔과 동행하는 사랑이다. 눈물을 동반하는 사랑, 연민의 사랑이다. 그러나 그 슬픔과 눈물의 원인은 밝혀져 있지 않다.
이청준의 코멘트는 무성의하다. "18세기 북구의 어느 소녀"와 "흰 눈송이처럼 순결한 영원한 처녀"라니? 그리고 "과연 우리 주변에 아직도 있는가"라니? 그렇다면 과거의 한국에는 그가 순결하고 영원한 처녀라고 말한 성적 공산주의자들이 여자들 가운데 흔했단 말인가?
나는 지금까지 < 겨울여자 > 라는 소설의 모자람을 계속 들춰왔다. 그렇다면 이화를 왜 이 글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다지? 내가 내세운 이화는 소설 속의 이화가 아니라 영화 속의 이화다. 물론 원작 소설 자체에 모자람이 있는데 영화가 넉넉할 수는 없다.
각색자 김승옥이나 연출자 김호선인들 무(無)에서 유(有)를 뽑아낼 재주가 있었겠는가? 희미한 기억 저편에서도, 나는 영화 < 겨울여자 > 역시 그렇고 그런 영화로 여긴다.
그러나, 아마도 삽입곡의 영향을 받아, 나는 지금도 이 영화를 떠올리면 가슴이 설렌다. 김세화씨의 '눈물로 쓴 편지'(소설 속에도 가사를 조금 달리 해서 수록돼 있다. 석기가 이화를 꾀기 시작하는 장면이다)와 누가 불렀는지 모를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들을 만했다.
이 작품이 내세우는 성적 공산주의는, 그 부작용을 막을 적절한 장치를 마련한다면, 한 사회의 성적 작동 원리로 추구해볼 여지도 있다. 나는 물론 성적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성에 사유재의 성격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이 완전히 상품화한 시대에 이화의 성적 공산주의는 혁명적 성격을 지닐 수 있다. 그래서 나 역시 그녀의 성적 공산주의를 이해할 준비는 돼 있다.
끝으로, 나를 이화에게 이끈 것은 < 겨울여자 > 라는 소설도 아니고 같은 제목의 영화도 아니었음을 털어놓아야겠다. 나를 이끈 것은 장미희라는 배우였다. 환하게 웃고 있는 장미희씨의 얼굴을 내세운 < 겨울여자 > 포스터가 지금도 생각난다. 내겐 성적 공산주의자 이화보다 그 역을 해낸 장미희씨가 더 포근하다.
배우로서 그녀가 겪었다는 이런저런 풍상에 넘어지지 않고 꿋꿋이 버텨낸 그 견딜성! 같은 세대의 나는 그녀 앞에서 모자를 벗는다. 나는 그녀가 광고 모델로 나오는 오렌지주스를 열심히 마신다. 비판으로 그득한 이 글은 배우 장미희를 향한 오마주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8> 샤를로트 코르데- 암살의 천사
한국일보 | 입력 2009.03.09
살육 광기 공포 분노의 소용돌이속, 프랑스 혁명의 우두머리에 비수를 꽂다 프랑스대혁명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의 뇌리에는 샤를로트 코르데(1768~1793)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을 것이다. 정식 이름이 마리-안 샤를로트 코르데 다르몽인 코르데는 1793년 7월 17일 파리 혁명광장(지금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참수되었다.
그보다 나흘 전, 그녀는 목욕 중인 장-폴 마라를 식칼로 찔러 죽였다. 마라는 로베르피에르, 당통과 함께 프랑스혁명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스위스 뇌샤텔(당시는 프로이센 령)에서 태어난 이 의사(醫師)-기자(記者) 출신 혁명가는 그 세 지도자 가운데 공포정치에 소극적이었던 지롱드파(온건파) 리더 당통보다는 물론이고, 극히 검소한 생활 속에서 맺고 끊음이 또렷해 '청렴가'(랭코?緻성仍?'Incorruptible)라 불렸던 자코뱅파(과격파) 리더 로베스피에르보다도 더 '혁명의 적들'에게 단호했다.
프랑스혁명이 오직 희망찬 무지갯빛 수레에 실려 굴러간 것은 아니다. 혁명광장에는 늘 잘린 머리가 나뒹굴었고 비릿한 피냄새가 자욱했다. 1792년 9월 2일부터 7일까지 엿새 동안 진행된 '9월 학살' 동안 감옥에서 살해된 '혁명의 적'들만 해도 1,200여 명에 이르렀다.
혁명의 전파를 염려한 프로이센의 침공으로 국경 일부가 무너지자 파리 시민들은 공포와 분노에 휩싸였고, 혁명 지도자들은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인민의 정의'에 호소하기로 결정했다. 그 구체적 방안은 '혁명의 적'으로 지목된 사람들을 혁명 지지자들이 재판 없이 살해하도록 놓아두는 것이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의 숭고한 깃발은 바로 그 지지자들에게 야만스럽게 짓밟히고 피로 얼룩졌다. 질서가 회복된 뒤에도 혁명은 공안위원회의 자코뱅 과격파들이 이끄는 공포정치에 휘둘리고 있었다.
노르망디 소귀족 집안 출신인 샤를로트 코르데는 혁명의 대의를 지지했지만, 그 속도와 강도가 지나치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9월학살의 책임이 마라에게 있다고 생각했고, 1793년 1월의 루이16세 처형도 불필요한 일이었다고 여겼다.
사태가 이대로 흐르도록 놓아둘 경우, 프랑스가 혁명파와 반혁명파 사이의 잔혹한 내전에 휩싸이게 되리라는 것이 그녀 생각이었다. 다시 말해 '반-혁명분자 사냥 캠페인'이 공화국을 궁극적으로 분열시키리라 판단한 것이다. 지롱드파 지지자였던 코르데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찾아냈다. 과격파 지도자 마라를 살해하는 것이었다.
노르망디 도시 캉에서 사촌과 함께 살고 있던 샤를로트는 파리로 가 물어물어 마라의 집을 찾아갔고, 캉에서 모의되고 있는 지롱드파의 반혁명운동에 대한 정보가 있다고 거짓 주장함으로써 목욕 중인 마라를 면담할 수 있었다.
피부병을 앓고 있던 마라는 집무를 대개 목욕탕 안에서 보았다. 샤를로트는 지롱드파의 반-혁명분자 명단이라며 종이 몇 장을 마라에게 건넨 뒤, 마라가 그걸 읽기 시작한 순간 식칼을 빼어들어 마라의 온몸뚱어리를 찢어놓았다. 마라는 현장에서 죽었고, 샤를로트는 체포되었다.
프랑스혁명의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라 할 이 사건은 그 뒤 여러 화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그림은 마라의 동료였던 자크-루이 다비드가 사건 직후에 그린 '마라의 죽음'이다. 이 그림에선 샤를로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막 살해된 마라의 모습이 성스럽게 보인다.
이 사건을 다룬 또 하나의 유명한 그림은 제2제정 때인1860년 폴 자크 에메 보드리라는 화가가 그린 '샤를로트 코르데'다. 보드리의 그림에는 막 죽은 마라만이 아니라, 그를 살해한 샤를로트 코르데가 그 옆에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작가가 그림의 제목에서부터 드러냈듯, 이 그림의 주인공은 마라가 아니라 코르데다. 벽에 걸린 프랑스 지도 앞에 선 코르데의 모습은 마치 '학살-혁명'이라는 괴물을 처치한 '생명과 자유의 수호자'처럼 보인다.
재판정에서 코르데는 자신이 단독으로 일을 벌였으며, "10만 명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의 목숨을 없앴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 해 1월 루이16세를 처형하기 직전, 로베스피에르가 한 말이기도 했다. 똑같은 말이 정반대 상황에서 발설된 것이다.
코르데에게 그 '10만 명'은 애매하게 반혁명분자로 몰린 시민들이었고, 로베스피에르에게 그 '10만 명'은 절대군주의 학정 속에서 굶주려 죽은 신민들이었다.
코르데의 이 레토릭은 또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 뒤 군중들 앞에서 브루투스가 했다는 연설의 한 대목을 연상시킨다. 그는 "카이사르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사실 이 논리는 동서고금 모든 테러리스트들의 명분이었다.
만일 코르데가 마라를 죽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혁명의 동력이 영원히 이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공포정치는 테르미도르에든 다른 달에든 이내 반동을 겪었을 것이다. 역사의 시계추가 오직 한쪽으로만 끝없이 내닫는 법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코르데의 마라 암살은 혁명의 열정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듯 보이던 시절에도, 그것에 반대하고 그것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자코뱅식(式) 공포정치는 주변 국가들의 군주들에게만 공포를 준 것이 아니라, 바로 프랑스혁명기의 상당수 프랑스인들에게도 공포와 혐오감을 준 것이다. 이들 공포정치의 반대자들이 꼭 반-혁명파는 아니었다.
프랑스혁명이 역사에서 이룬 가장 큰 업적, 곧 신분제의 폐지는 일부 귀족들과 승려들을 제외하곤 대다수 프랑스인들에게서 환영받았다. 그러나 그것을 이룬 방식, 곧 프랑스 전체를 피로 물들이는 방식엔 도리질을 치는 사람이 많았다. 코르데도 그런 사람에 속했다.
코르데가 처형된 직후에 벌어졌다고 전해지는 일화 하나는 혁명에 대한 당대 시민들의 양가감정(兩價感情)을 보여준다. 코르데의 목이 잘려나가자, 르그로라는 이름의 사내가 코르데의 잘려나간 머리를 집어들고 마구 따귀를 갈겨댔다. 열광적 마라 지지자였든지, 허세부리기 좋아하는 멍텅구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행동은 곧 지켜보던 군중의 분노를 샀고, 그 분노를 눅이기 위해 공안당국은 르그로를 징역 3개월형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코르데의 살인행위가 참수형에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한 시민들도, 잘려나간 머리에 대한 더 이상의 모욕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단독범이라는 코르데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공안당국은 그녀를 부검해 처녀성을 확인했다. 잠자리와 살인 음모를 그녀와 더불어한 남자가 있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처형자들의 의심과 달리 코르데는 처녀였다. 이 처녀는 잔다르크 이후 프랑스 역사에 개입했던 가장 유명한 처녀일 것이다.
혁명의 열기가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뒤, 적잖은 예술가들이 코르데의 삶과 죽음을 제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앞에서 언급한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나 보드리의 '샤를로트 코르데' 같은 회화 작품 외에도, 그녀의 삶은 소설, 연극, 오페라, 대중가요에까지 흔적을 남겼다.
알퐁스 드 라마르틴은 1847년 간행한 < 지롱드파의 역사 > 에서, 코르데를 '암살의 천사'(l'ange de l'assassinat)라고 불렀다. 모계 쪽으로 극작가 피에르 코르네유를 조상으로 둔 이 당찬 여자는 그래서 악(암살)과 선(천사)을 동시에 대표하게 되었다. 라마르틴은 존경과 연민을 담아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이 유명한 별명을 붙였다.
샤를로트 코르데는 프랑스혁명의 주체(또는 희생자) 가운데 매우 드물게 능동성을 보였던 여자다. 20세기 러시아혁명 때만 해도 수많은 여성이 활약했지만, 그보다 1백수십 년 전 프랑스혁명 때 여성의 자리는 없었다. 그래서 남자와의 아무런 공모 없이 혁명의 (그릇된) 지도자를 살해한 코르데는 또 다른 혁명, 여성해방혁명의 선구자로도 볼 수 있었다.
프랑스혁명은 코르데말고 또 한 사람의 유명한(결과적으로 유명하게 된) 여자를 죽였다. 극작가이자 페미니스트 올랭프 드 구주(1748~1793)가 그 사람이다. 그녀 역시 코르데처럼 지롱드파를 지지했는데, 로베스피에르를 비방한 죄로 단두대에 머리를 들이밀게 되었다.
그녀는 "여성이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의정단상에 오를 권리도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렇다면 여성에게 코르데처럼 '테러의 권리'도 있을 것이다.(물론 코르데의 '테러'는 '공포정치'의 '공포'에 해당하는 '테러'에 맞선 대항테러였다.)
코르데는 테러리스트였는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녀는 압제자에 맞선 해방전사, 자유의 투사이기도 했다. 안중근이 그랬고, 김구가 그랬고, 윤봉길이 그랬듯. 그들은 암살이 소명인 천사들이었다.
객원논설위원
[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9> 라 파시오나리아
한국일보 | 입력 2009.03.16
수난의 가시밭길 헤치고 이상향으로 내달렸던 '열정의 꽃' "놈들이 지나가도록 놔두지 않겠어!" 스페인 내전의 영웅
우리가 보통 '열정, 정열, 정념'이라 번역하는 유럽어(이를테면 영어 패션ㆍpassion)는, 멜 깁슨의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 of the Christ')에서도 보듯, 본디 뜻이 '수난'이다.

라틴어 'passio, -onis'를 차용한 것인데, 이 라틴어 명사는 '괴로워하다, (고통을) 당하다'라는 뜻의 동사 'pati'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 동사는 정신적 괴로움만이 아니라 육체적 고통스러움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열정이라는 것은 passion의 2차적 뜻이다. 수난이나 고통을 열정과 연결시킨 유럽인들의 상상력이 날랬든 엉뚱했든, 열정이 어느 정도 고통을 수반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열정에는, 설령 고통까지는 아니더라도, 얼마쯤의 스트레스가 따른다.
그것은 passion이 '(수동적으로) 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assion의 수동성은, 예컨대 영어의 passion/action, passive/active,/ patient/agent 같은 낱말쌍에서 또렷이 드러난다. 격정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거기 사로잡히거나 휩쓸리거나, 그것을 잃을 수 있을 뿐이다.
이 passion이라는 말에서 나온 꽃이름으로 passion flower(영어), passiflore(프랑스어), pasionaria(스페인어)라는 것이 있다.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말들이다. 우리말로는 '시계꽃', 또는 '꽃시계덩굴'이라 불리는 풀인데 꽃잎이 불그스레하다.
그 꽃말은 '성스러운 사랑'이다. 붉은 색은 대체로 뜨거운 열정을 상징한다. 인간세상의 그 열정 가운데 큰 것이 이념을 향한 열정이다. 스페인 바스크 출신의 공산주의자 돌로레스 이바루리 고메스(1895~1989)가 '라 파시오나리아'를 필명으로 삼은 것은 그래서 그럴 듯하다. '라(la)'는 스페인어 여성 단수 정관사다.
이바루리 고메스의 퍼스트네임이 돌로레스인 것도 흥미롭다. 스페인어로 돌로레스는 고통, 괴로움을 뜻하기 때문이다. 돌로레스는 패션, 곧 수난인 것이다. 스페인어권 사람들, 자식 이름 짓는 취향이 좀 별났다. 돌로레스가 스페인어권에서 흔한 이름이어서 하는 말이다.
돌로레스 이바루리 고메스(앞으로는 라 파시오나리아라 부르자)는 20세기 스페인 공산주의 운동을 이끈 사람이다. 가난 탓에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독학으로 마르크스의 책들을 읽었고, 뒷날 모스크바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11남매의 여덟째였고, 결혼해서 자식 여섯을 두었다. 그 자식 가운데 넷은 어려서 굶주림으로 죽었고, 외아들은 뒷날 제2차 세계대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적군(赤軍)으로 참전해서 전사했다.
라 파시오나리아라는 이 열정의 꽃이 고통의 꽃이기도 했다면 그 으뜸가는 이유는 자신이 거두지 못한 자식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한 1989년에 작고한 것은 그녀의 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평생 지녀왔던 신념이 밑동까지 흔들리는 것을 보지 않고 죽었으니 말이다.
라 파시오나리아라는 이름을 역사에 굵은 글씨로 새긴 계기는 스페인 내전(1936~39)이다. 탁월한 웅변가였던 그녀는 치열했던 마드리드 전투를 '노 파사란!'(No Pasaran! : They shall not pass!)이라는 구호로 이끌었다.
"놈들이 여길 지나가도록 놔두지 않겠어!" 정도의 뜻이다. 그녀가 우렁찬 연설로 군중을 선동할 때, 꽃시계덩굴은 힘찬 열정으로 사방팔방 뻗어나가 파시스트들의 목을 죌 것 같았다.
그러나 프랑코의 파시스트 군대는 결국 마드리드를 함락시켰고, 쿠데타 성공 이후 스페인에선 모든 좌파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라 파시오나리아는 소련으로 망명했고, 그 곳에서 정치를 계속했다.
유럽 각지에서 소련으로 피신한 적잖은 정치적 망명객들과 달리, 라 파시오나리아는 소련 당국과 별 갈등이 없었다. 1930년대부터 코민테른 활동을 했다는 점이 그녀와 소련 당국 사이의 친밀감을 키웠을지도 모르고, 외국인 출신의 걸출한 정치 지도자를 후원하고 있다는 선전을 소련 당국이 계산에 넣었을지도 모른다.
파시스트의 승리로 끝난 내전 뒤 라 파시오나리아는 기다란 망명 생활을 강요받았지만, 그녀는 망명 생활을 하면서도 스페인 공산당을 이끌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무렵 그녀는 스페인 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돼 1960년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물론 몸은 소련에 있었다. 총서기 자리를 산티아고 카리요에게 물려준 1960년부터 1989년 작고할 때까지는 스페인 공산당 의장이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반세기 가까이 스페인 공산당의 상징이고 우두머리였다. 그 기간의 대부분을 소련에 있었으므로 신변의 안전도 보장되었다. 그녀가 스페인으로 다시 돌아간 것은 프랑코가 죽은 직후인 1975년이었다. 두 해 뒤에 그녀는 국회의원이 되었다. 1936년 이래 39년 만이었다.
라 파시오나리아의 삶에는 열정과 수난이 버무려졌지만, 그녀의 정치적 운은 나쁘지 않았다. 스페인 공산당의 가장 중요한 직책을 스페인 바깥 안전한 곳에서 수행했고, 조국이 민주화되어 귀국한 뒤에는 서유럽공산당에서 레닌-스탈린주의의 빛깔을 눅이려는 유로코뮤니즘 운동에 가담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계속 모스크바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면, 그녀가 유로코뮤니즘 운동에 몸을 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라 파시오나리아에게 아우라를 부여해 뒷날 공산당의 중요 직책을 맡게 한 것은 스페인 내전기의 활동이다. 덧없지만 흥미로운 가정을 해보자. 만일 1936~39년의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 정부가 프랑코의 쿠데타를 제압하고 승리했다면(굉장히 어려운 승리였을 것이다), 그것은 스페인과 세계를 위해서 좋은 일이었을까?
소신있는 파시스트가 아니라면 모두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당시 스페인 내전은 세계 양심의 시험장이라 불렸다. 그리고 그 양심은 국제여단의 공화파 지지에도 불구하고 처절히 패배했다.
그런데 만일 영국, 프랑스 정부가 공화파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히틀러가 팔짱을 끼고 있어 그 양심이 승리했다면, 다시 말해 프랑코의 쿠데타가 실패했다면, 그 뒤의 역사는 어떻게 굴러갔을까? 공화파 정부가 이겼더라도 3년간의 내전으로 스페인은 어차피 황폐해져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황폐해진 스페인은 곧바로 제2차 세계대전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주변의 민주주의 국가들을 단번에 유린한 히틀러가 '민주주의 스페인'을 그냥 놓아두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이 가상세계에서, 스페인은 3년간의 내전에 이어 6년간의 세계대전에 곧바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내전에서 승리했다는 감격과 자부심이 커 스페인 민주주의자들이 호락호락 백기를 들지도 않을 것이다.
아니 프랑스에서 그랬듯 스페인의 민주주의 정부가 히틀러에 힘없이 무너져 파시스트 괴뢰정부가 들어선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독일은 프랑스의 경우처럼 스페인 영토의 상당부분을 직접 점령하고, 나머지 지역의 행정을 괴뢰정부에게 맡겼을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스페인에서는 또 다른 내전이 시작됐을 것이다.
괴뢰정부에 반대하는 좌파 레지스탕스와, 히틀러(나 무솔리니)가 조종하는 괴뢰정부 사이에 말이다. 그럴 경우, 라 파시오나리아는 당연히 레지스탕스의 선봉에 섰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스페인 괴뢰정부는 히틀러를 도와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힘든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의 역사에서는 스페인 내전에서 파시스트가 이겼다. 게르니카 폭격을 비롯한 독일의 도움이 컸다. 그러나 내전이 끝난 뒤, 프랑코는 히틀러의 여러 차례 제안에도 아랑곳않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저 추축국 쪽에 우호적 중립을 지켰을 뿐이다. 히틀러로서는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이념을 지닌 군사대국 스페인을 적으로 돌리는 어리석은 짓을 그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스페인은 유럽만이 아니라 온 세계가 휘말려 들어간 전쟁에 끼이지 않고 국토를 보전할 수 있었다.
비록 프랑코의 탄압으로 국내 민주주의는 말살됐지만, 그리고 전후에도 독재체제가 계속됐지만, 유럽 중추국가의 하나로서 6년간의 세계대전에서 면제될 수 있었다는 것은 보통 행운이 아니었다. 독재자 프랑코는,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수십만 스페인 젊은이들의 목숨을 구했다.
더구나 전쟁이 끝난 뒤, 미국은 유럽의 반공동맹을 위해 국제여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프랑코의 파시스트 정부와 협력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가 승리했다면, 전후엔 좌파 정부가 들어서기 십상이었을 것이고, 스페인이 미국의 지지를 받아 경제를 발전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을 새옹지마라 해야 할까, 역사의 아이러니라 해야 할까? 지하의 라 파시오나리아는 어쩌면 공화파의 패배를, 자신이 마드리드를 지켜내지 못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10> 사포 - 열 번째 뮤즈
2009년 03월 23일 (월) 03:22
사랑과 아름다움을 노래한 최초의 서정시인, 뮤즈였으나 외설이 된… 효시 의견 분분하지만 실력은 최고, 플라톤 "그녀는 열번째 뮤즈" 칭송 고향 레스보스에서 여제자들과 애정, 여성 동성애자 레즈비언의 어원으로

어떤 분야에서든, 처음 곧 최초는 명예로 받아들여진다. 심지어 그것이 사악한(?) 일일 경우에도, 당사자는 그것을 자랑스레 여길 수 있다. 9ㆍ11 테러 주체들은 자신들이 비행기 자살테러라는 것을 처음으로 실행한다고 뻐겼을지 모른다.
물론 이 주장에는 태평양전쟁 때 죽은 가미카제의 영혼들이 항의할 것이다. 하물며 좋은 것의 시초야 명예롭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일에는 효시(嚆矢)가 있다”고 말할 때 그 효시라는 말에는 어떤 아우라가 실려 있다. 알다시피 효시는 사물의 맨 처음이라는 말이다. 글자 뜻은 ‘소리 나는 화살’ ‘우는살’이지만, 옛 중국에서 개전(開戰)의 신호로 우는살을 쏘았다 해서 사물의 처음을 뜻하게 됐다. “<홍길동전>은 한국어 소설의 효시이다”에서처럼.
서정시의 효시는 뭘까? 다시 말해 최초의 서정시인은 누굴까? 이런 우문(愚問)도 없으리라. 이 물음에는 어떤 텍스트를 서정시로 확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만이 아니라, 언제 또 새로운 문헌이 발견될지 알 수 없다는 고고학적 문제가 개입돼 있기 때문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언어의 음악성과 정감을 깨달은 뒤부터 최초의 기록된 서정시(조차 확정할 수 없지만)가 쓰이기까지 수없이 많은 서정시적 텍스트가 씌어졌을 것이고 망실됐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최초의 서정시인으로 흔히 사포(기원전 620~기원전 565)를 거론한다. 제 이름으로 서정시를 여럿 남긴 최초의 시인이라는 뜻일 테다. 물론 이것은 그릇된 상식이다. 이 고대 그리스 여자 이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서정시(라고 여겨지는 것)를 썼을 테고, 그녀의 동시대인들도 그랬을 것이다.
서사시인으로 일컫긴 하지만 호메로스만 하더라도 사포보다 거의 200년 전 사람이고, 사포의 동시대에도 서정시인은 많았을 것이다. 실제로 사포가 동시대 시인 아르카이오스와 시를 서로 교환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사포를 ‘최초의’ 서정시인이라 일컫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사포를 ‘최초의’ 서정시인이라 함은 그녀가 예로부터 그녀 동시대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서정시인이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것일 테다. 또 이것은 순전히 유럽 중심의 관점이다. 공자가 311편으로 간추려 정리했다는 <시경(詩經)>에 수록된 시들 가운덴 사포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창작돼 기록된 시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선 상투적 진술에 따라 사포를 최초의 서정시인으로 여기자. 그 진술이 정확하지 않다 해도, 그릇된 상상 속에서나마 어떤 일의 효시를 여성이 해냈다는 사실은 인류의 반에게 자부심이다.
알렉산드로스제국 시대에는 그녀의 시가 아홉 권으로 분류되었고, 제1권에 1,320행이 수록돼 있었다 한다. 사포는 대단한 다작 시인이었던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650행 가량이다. 사실 이만한 분량이 남아있는 것만 해도 행운이다. 앞질러 말하자면, 그녀 시의 상당수는 그 동성애적 함의 때문에 인위적으로 멸실됐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현전하는 사포의 서정시들이 대단히 뛰어나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포가 최초의 서정시인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증이 될지도 모른다. 맨처음 것이 뛰어나기는 어려울 테니 말이다.
사포의 시가 훌륭했다는 근거로 내세우는 평가 가운데 플라톤이 했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뮤즈가 아홉 명이라고 말한다. 얼마나 경솔한가! 잘 봐라, 레스보스 출신의 사포가 있다. 그녀가 열 번째 뮤즈다.”
잘 알다시피 뮤즈는 시나 음악, 학예를 주관하는 아홉 여신이다. 그래서 영어로도 보통 ‘the Muses’라고 복수로 표현한다. 플라톤은 사포 서정시의 경지를 시와 음악의 신에게까지 견준 것이다.
사포의 삶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레스보스 섬 미틸레네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고, 정치적 혼란에 휘말려 다른 귀족들과 함께 시칠리아 섬에서 망명생활을 했으며,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어린 소녀들을 모아 시와 음악을 가르쳤다는 것 정도다. 그리고 게르퀴라스라는 부유한 남자와 결혼해서 딸을 하나 두었다고 전해진다.
유럽어에서 여성동성애를 뜻하는 말(예컨대 영어의 새피즘ㆍsapphism이나 레즈비어니즘ㆍlesbianism)의 어원은 이 여성시인의 이름 사포와 그녀의 고향인 레스보스 섬이다.
사람 이름 뒤에 ‘-ism’(이나 이와 비슷한 형태의 접미사)을 붙여 그 사람의 이념이나 행태를 표현하는 것은 유럽어에서 흔한 일이다. 마르크시즘이나 프로이디즘이나 마오이즘 같은 말은 우리 귀에도 익숙하다.
이런 말들의 어원이 되는 데 별다른 자격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당신도 자신의 이름에 ‘-ism’을 붙여 어떤 이념의 교주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저널리즘(이것도 ‘-이즘’이군. 이 말의 앞부분은 ‘날’이라는 뜻이다. 매일매일 기록하는 것이 저널리즘이다)에서는 무수한 ‘-이즘’이 출몰한다.
카스트로이즘(피델 카스트로), 클린터니즘(빌 클린턴), 골리즘(샤를 드골), 레이거니즘(로날드 레이건), 블레어리즘(토니 블레어), 매카시이즘(조지프 매카시), 대처리즘(마거릿 대처), 티토이즘(요시프 브로즈 티토), 트로츠키이즘(레온 트로츠키) 등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이 많은 ‘-이즘’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이 ‘류머티즘’(!)이라는 농담도 있다.
이때, 이런 이념이나 운동 명칭의 기원이 된 이름을 에포님(eponym)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사포’는 ‘새피즘’의 에포님이고, ‘레스보스’는 ‘레즈비어니즘’의 에포님이다. 에포님에 꼭 ‘-이즘’이 따라 붙는 것은 아니다. 적잖은 과학자들은 그 이름 자체로 과학 분야 단위의 에포님이 됐다.
전류 단위 암페어(A)의 앙드레-마리 앙페르, 전하량 단위 쿨롱(C)의 샤를 오귀스탱 드 쿨롱, 진동수 단위 헤르츠(Hz)의 하인리히 루돌프 헤르츠, 일과 에너지 단위 줄(J)의 제임스 프레스콧 줄, 전력 단위 와트(W)의 제임스 와트, 전압 단위 볼트(V)의 알레산드로 볼타, 압력 단위 파스칼(Pa)의 블레즈 파스칼, 방사능 단위 베크렐의 앙투안 앙리 베크렐(Bq), 힘의 단위 뉴턴(N)의 아이작 뉴턴 따위가 그 예다.
또 다른 과학자들은 새로 발견된 원소 이름에 제 이름을 에포님으로 빌려주었다. 보리움(Bh, 107)의 닐스 보어, 페르미움(Fm, 100)의 엔리코 페르미, 로렌시움(Lr, 103)의 어니스트 로렌스, 멘델레비움(Md, 101)의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노벨리움(No, 102)의 알프레드 노벨, 뢴트게니움(Rg, 111)의 빌헬름 뢴트겐처럼.
그러면 과연 만년의 사포가 레스보스에서 여제자들과 동성애를 실천했을까? 거의 확실하다. 많은 문헌이 사포의 동성애를 기록하고 있다. 그 문헌 가운데 대부분은 사포 자신의 시다. 그 사랑이 정신적 사랑만이 아니라 육체적 사랑까지를 포함했음은 물론이다.
사포 시절에 동성애는, 여성동성애든 남성동성애든, 아무런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시대의 레스보스에 일종의 여성해방이라 할 만한 분위기가 조성돼 있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질문을 이리 바꿔보자, 그러면 사포는 동성애자인가?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양성애자라는 규정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녀는 결혼까지 해 딸을 두었고 뭇 남자들과 염문을 뿌렸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적잖은 이성애자들은 잠재적 양성애자들이다. (아닌가?) 플라톤이 열 번째 뮤즈라고 상찬했던 사포의 시들을 1703년 비잔틴 주교는 대량으로 불태웠다. 그 주교에게는 동성애적 뉘앙스가 곧 외설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사포는 뒷날의 숭배자들에게 아프로디테(비너스)에 견줄 만한 미인으로 상상돼 왔다. 그녀의 딸 클레이스가 ‘황금꽃처럼 아름다웠다’고 전해지고 있는 걸 보면, 그 어머니가 미인일 가능성이 크겠다.
실제로는 추녀였다 하더라도, 서정시의 여제(女帝)에게서 미적 결핍을 상상하기는 어려울 터이다. 사포의 죽음에 대해선, 미틸레네의 선원 파온과의 비련에 절망해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그것도 후세 사람들의 상상력이 빚어낸 낭만적 이야기일 수 있겠다.
최초든 아니든, 사포가 매우 뛰어난 서정시인이라는 점에 많은 고전학자들이 동의한다. 그녀는 새로운 리듬과 운율을 창조해냈고, 서정시의 여러 갈래에 손을 댔다. 그녀는 사랑과 미의 시인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인간 존재를 휘두르는 열정의 기록자였다는 뜻이다. 그런 그녀에게 늙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녀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내겐 이제 목소리가 없네, 내겐 이제 혀가 없네, 내 언어는 부서지고 마네, 미세한 불꽃이 내 살갗 아래 흐르네, 내 눈은 더 이상 볼 수가 없네(....) 오한이 내 몸 전체를 뒤덮네, 나는 풀보다 더 푸르러지고, 죽음 바로 곁에 있음을 느끼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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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11> 요네하라 마리 - 정숙한 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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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 입력 2009.03.30
두 문화의 경계서 서로 다른 정신적 불꽃을 소통시키다 소녀시절 체코서 러시아어 배워 日 제일의 통역사에 온 세상 정경문사철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한 독서광 경쾌한 문체에 유머감각까지 갖춰 문필가로도 성공
대다수 한국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요네하라 마리(米原万里ㆍ1950.4.29~2006.5.25)를 처음 만난 것은 < 프라하의 소녀시대 > (원제 '거짓말쟁이 아냐의 진홍색ㆍ眞紅色 진실')에서였다.
일본에서 이 책이 나온 것은 2001년이지만, 한국어판이 나온 것은 2006년 11월이므로, 저자가 죽은 지 몇 달 뒤에야 그 이름을 알게 된 것이다. 일종의 수기라 할 < 프라하의 소녀시대 > 는 1960년대 전반 요네하라 마리가 체코의 프라하에서 소비에트학교(외교관들이나 공산당 간부의 자제를 위해 소련 대사관이 운영했던 국제학교다.
저자의 아버지는 일본공산당 간부였다)에 다닐 때의 추억을 현재와 포개고 있다. 그 시절 친구들인 그리스 출신의 리차, 루마니아 출신의 아냐, 옛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야스나를 찾아가 만나는 과정이 책의 후반부를 이룬다. 내게 이 책의 재미를 배가시켜준 것은 시공간적 배경이었다. 1960년대 전반의 프라하! 그곳은 한국인들에게 금단의 땅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때 그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특히 체코어와 러시아어를 함께 쓰는 외국인 소녀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세계 다른 곳의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울고 웃고 화내고 즐기며, 그들만의 이채롭고 다감한 소녀시대를 보내고 있었다. 내가 프라하에 처음 가본 것은 마리(당시엔 10대 전반의 소녀였으니, 친근한 척 이름만 한 번 불러보자)가 소비에트학교에 다니던 시절로부터 30년이 지난 뒤였다. 30년 전에도 그랬을 프라하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공산주의 체제의 흔적은 거의 사라진 뒤였다. 나는 < 프라하의 소녀시대 > 를 읽으며, 내가 가본 프라하의 풍치들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이 책에서 특히 가슴 뭉클하게 펼쳐지는, 마리가 야스나를 다시 만나는 장면에서는 내가 가본 베오그라드의 정겨움이 저절로 떠올랐다. 나는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대한 요네하라의 견해가 나와 비슷해 기뻤다. 전쟁에서 선악은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다. 유고내전에서 반인도범죄를 저지른 것은 세르비아인들만이 아니었다. 요네하라 마리는 이 책으로 제33회 '오야 소이치 논픽션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책이 순전한 논픽션은 아닐 것이다. 40년 전의 일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더구나 그것이 짧지 않은 대화 내용 같은 것이라면. 요네하라 마리는 아마, 약간 선의의 분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기억이 허용하는 한 최대의 정직성을 발휘했음이 분명하다. 예컨대, 배우 알랭 들롱이 유고 출신이어서 미남이라는 한 친구의 주장이 그대로 마리의 지식이 돼 인용되기도 한다(들롱은 파리 남쪽 교외 소ㆍSceaux 라는 곳 출신이다). 요네하라는 프라하 시절의 감회를 남기는 데 이 수기로는 성에 안 찼던지, 소비에트 학교의 무용 교사를 모델로 삼아 < 올가의 반어법 > 이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요네하라 마리의 직업은 일본어와 러시아어를 오가는 동시통역사였다. 세상에는 수천, 수만의 직업이 있지만, 그 가운데 타고난 재능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일 가운데 하나가 동시통역사 노릇일 게다. 그(녀)에게는 둘 이상의 언어 능력과 방대한 영역의 지식만이 아니라, 임기응변의 민첩함, 긴장감을 견딜 수 있는 결기, 집중력 같은 것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요네하라 마리는 소녀시절 프라하에서 배운 러시아어를 도쿄외국어대학과 도쿄대학에서 계속 전공했고, 마침내 일본 제일의 러시아어 동시통역사가 되었다. 그런데 자신의 직업에 아쉬움이 있었나 보다. '글은 남고 말은 날아간다'는 속담이 가리키듯, 통역사의 노동은 대개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 그것은 허공으로 사라진다. 반면에 번역가의 노동은 기록으로 남는다. 기록으로 남지 않는 자신의 노동을 보상하기 위해 요네하라 마리는 문필가가 됐는지 모른다. < 프라하의 소녀시대 > 이후 쏟아져 나온 그의 한국어판 책들은, 56세에 난소암으로 작고한 이 여자의 본업이 동시통역인지 문필업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요네하라 마리의 책들을 출간한 출판사 쪽 얘기를 들어보면, 그녀의 작품이 앞으로도 계속 한국어로 나올 모양이다. 일본어를 읽을 줄 모르는 나는 그저 그녀의 다른 책들이 빨리 번역되기를 기다릴 뿐이다. 그간 번역돼 나온 그녀의 책들은 다 읽었다. 그 책들은, 앞에서 언급한 책들을 빼면, < 마녀의 한 다스 > < 미녀냐 추녀냐 > < 대단한 책 > 따위다. < 마녀의 한 다스 >와 < 미녀냐 추녀냐 >는 통역사로서의 경험이 없으면 쓰기 어려운 책이다. 서로 다른 문화가 접촉할 때 생기는 정신의 불꽃들을 경쾌한 문체로 그려냈다. 통역사(번역가도 그렇겠지만)는 두 문화에 걸터앉아 있는 보편인이다. 그(녀)의 노동에 힘입어, 서로 摸?문화는 겹치며 스며든다. < 마녀의 한 다스 > 는 서양에서 불길한 숫자로 여기는 13이 문화권에 따라서는 다른 함의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아, 문화들의 교차를 살핀다. 이 책을 떠받치고 있는 철학은 "의미는 서로 다른 문화가 교차하는 순간에 비로소 생긴다"는 바흐친의 말이다. 사실, 의미란 곧 차이라는 것은 언어학의 기본 명제다. 이 책이 술술 읽히는 것은 경쾌한 문체 때문만이 아니라 은근히 '외설적인' 저자의 유머감각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저자는 한 언어에서 성스러운 의미를 지닌 낱말과 다른 언어에서 비속한 의미를 지닌 낱말이 비슷한 음상을 지닌 경우의 예를 자주 든다. 특히 통역하면서 거듭 거론해야 하는 사람 이름이 다른 언어에서 성적 뉘앙스를 지녔다거나 아예 성기 이름과 비슷할 때, 통역사의 고민은 커진다. 청중들이 웃어대고 연사는 영문을 몰라 당황해도, 통역사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어야 한다. < 미녀냐 추녀냐 >는 번역 이론에서 오랜 논쟁을 빚은 '부정한 미녀'와 '정숙한 추녀'를 주제로 통역만이 아니라 번역문제까지를 거론한다. 그것은 좁혀서 얘기하면 직역이냐 의역이냐의 문제이고, 다르게 말하면 통역(번역)된 언어가 출발언어에 더 가까워야 하느냐 도착언어에 더 가까워야 하느냐의 문제다. 직역한 언어는 출발언어(의 구조나 감성)에 더 가까울 수밖에 없고(정숙한 추녀), 의역한 언어는 도착언어(의 구조나 감성)에 더 가까울 수밖에 없다(부정한 미녀). 통역-번역자는 이 사이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언어를 뒤쳐야 한다. 이 두 책은, 이론적 깊이랄 만한 것은 모자라지만, 특히 통역이나 번역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한 번쯤 읽어보아야 할 실천적 지침서다. 앞으로 계속 요네하라의 책이 번역돼 나올 테니, 또 어떤 보석이 끼어있을지 알 수 없다. 지금까지 번역된 책 가운데 독자에게 한 권만 추천하라면, 나는 < 프라하의 소녀시대 >와 < 대단한 책 > 사이에서 망설일 것이다. < 대단한 책 >은 책에 대한 책이다.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논평 모음. 본격적 서평도 드문드문 눈에 띄지만, 대개는 짤막한 감상문이다. 이 책은 요네하라가 얼마나 바지런한 독서가였는지를 보여준다. 전공이 러시아학이므로 러시아에 관한 책이 드물지 않게 논평 대상이 되지만, 그녀가 읽고 평한 책은 온 세상 정경문사철의 경계를 넘나든다. 더구나 그녀는, 이 책에 모인 글을 쓸 때, 암과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암 투병 중이었던 만큼, 암치료법 책들에 대한 논평도 자주 보인다. 일본에도 한국처럼 그런 책들이 많이 나오나 보다. 그리고 그 책들 대부분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책임한 쓰레기인가 보다. 환자로서 그 책들을 읽은 요네하라가 낙심하는 모습이 여기저기 비친다. 여기 모인 글 가운데 하나는 그녀가 작고하기 이틀 전에 활자화됐다. 책 제목의 '대단한 책'에서 '대단하다'는 것은 그녀가 읽은 책들을 가리키겠지만, 내게는 바로 이 책이야말로 대단한 책이다. 요네하라 마리는 상복이 있는 사람이었다. < 프라하의 소녀시대 > 말고도 여러 책이 평판 있는 문학상을 받았다. 그게 나로서는 좀 의외다. 나는 요네하라 마리의 책을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 책들이 상을 받을 만한 걸작들이라고는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문체가 밋밋하고 상투적이다. 그녀가 문장가는 못 된다는 뜻이다. 번역 과정에서 원문의 생채가 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정말 뛰어나고 아름다운 문장은 아무리 못난 번역가를 만나도 그 생채의 일부를 남겨 독자에게 보여주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녀가 문장가가 아니라는 것은 그녀에 대한 평가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그녀의 책들이 보여주는 다감함, 날렵함, 섬세함, 유머감각 따위는, 요컨대 '에스프리'는, 여느 문필가가 쉽게 다다를 수 없는 경지에 있다. 나는 요네하라 마리의 충성스러운 독자다. 생전에 한 번 만나봤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숭배자이기도 하다. 그녀는 독신으로 살다 죽었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12> 니콜 게랭-흑장미 향내의 싱글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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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 입력 2009.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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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안해도 아이는 낳고 기를거예요"… 인습에 맞선 68혁명의 상징 의사란 직업의 커리어우먼이자 체제·제도·질서에서 독립적 의식 소유 그녀가 남긴 사생아는 전통적 가족에 대한 1968년의 또다른 유산
< 러브 스토리 >(1970)의 저자 에릭 시걸은 내가 매우 좋아하는 대중소설가다. 그가 고전문학자로서 쓴 논문이나 저서는 한 편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의 달콤쌉쌀한 대중소설들은 거의 다 읽은 것 같다. 일급 대중소설가답게 시걸이 얽어내는 극적 구성과 지칠 줄 모르고 수행하는 말놀이는 얄팍한 내 감성을 늘 만족시킨다.
이미 읽은 독자들도 적잖겠는데, 그의 1980년도 작품에 < 남자, 여자 그리고 아이 >(Man, Woman, and Child)라는 게 있다. 거기서 남자는 MIT(매사추세츠공과대학)의 통계학 교수 로버트 베크위스고, 여자는 그의 아내 셰일라다.
셰일라는 하버드대 출판부 직원이다. 그들은 소설 도입부 시점으로부터 10여 년 전 예일대학과 바사대학 학생으로서 한 파티에서 만났고, 한 눈에 서로 반해 곧 결혼했다. 그리고 제시카랑 폴라라는 딸을 두었다. 단란한 미국 동부 중산층 가정의 전형이다. 소설 제목의 '아이'는 그러나 제시카도 폴라도 아니다. 그 아이는 장-클로드 게랭이라는 프랑스 아이다. 소설 들머리로부터 10년쯤 전, 셰일라가 폴라를 뱃속에 품고 있던 동안, 로버트는 학술대회에 참가하러 남프랑스의 몽펠리에(사회학자 오퀴스트 콩트의 고향이다)를 잠깐 방문한다. 그 때 프랑스는 '혁명' 중이었다. 1968년 5월이었던 것이다. 로버트는 신분증을 지니지 않은 채 호텔 밖으로 나갔다가 시위대 일원으로 몰려 경찰에게 폭행을 당하고, 체포되기 직전 한 젊은 여의사의 도움으로 현장에서 빠져나온다. 그 여의사의 이름은 니콜 게랭이다. 로버트는 니콜의 병원에서 긴급치료를 받은 뒤, 인근의 세트(소설 속에서 니콜의 고향인 이 항구도시는 시인 발레리의 고향이기도 하다)에서 니콜과 함께 지중해에 몸을 담그고 사흘밤을 함께 지낸다. 그리곤 매사추세츠의 일상으로 돌아온다. 니콜과의 세 밤은 로버트가 10여 년의 결혼생활 동안에 셰일라에게 저지른 단 한 번의 배신행위였다. 로버트는 곧 그 일을 잊는다. 10년 뒤 어느 날, 보스턴의 프랑스영사관에서 전화가 걸려오기까지는. 레지옹도뇌르 훈장이라도 받게 되나 보다 하는 기대를 갖고 영사관을 방문한 로버트에게 전해진 것은 니콜이 며칠 전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이다. 10년 만에 듣는 니콜이란 이름에 당황한 로버트는 이어서 더 황당한 사실을 알게 된다. 친인척이 거의 없는 니콜이 장-클로드라는 아이(로버트의 아이이기도 하다)를 혼자 키워왔다는 것이다. 장-클로드가 고아원으로 가지 않게끔 프랑스 쪽 후견인이 이런저런 절차를 마무리하는 동안, 이 꼬마는 대서양을 건너와 한 달 간 로버트의 집에 머물게 된다. 소설의 초점은 이 장-클로드라는 아이의 존재가 로버트의 가정에 빚어내는 갈등이다. 소설 도입 시점에서 이미 죽었으므로, 장-클로드의 엄마 니콜 게랭은 소설에서 거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뒷부분의 세 챕터에서 로버트의 회상 속에 등장할 뿐이다. 그 희미한 회상 속에서, 니콜은 짙은 흑장미 향내를 풍긴다. 소설은 니콜의 삶에 대해 정보를 거의 주지 않는다. 로버트를 만나기 전까지의 삶만이 아니라, 로버트도 모르게 그의 아이를 낳고 기르던 10년 가까운 삶(소설 속에서 장-클로드는 아홉 살이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독자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녀가 68년 5월 시위에 참가했고(그러니까 드골을 반대했고), 몽펠리에의 종합병원과 세트의 작은 병원을 오가며 환자들을 돌보는 헌신적 의사였으며, 평생 결혼할 생각이 없었던 독립적 여성이었고, 그래도 아이를 가질 생각은 있었던 여자라는 사실이다. 함께 아이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될 만큼 좋은 상대가 나타난다면 말이다. 그리고 로버트가 우연히도 그 상대가 되었다. 사흘은 사랑이 무르익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지만, 그래서 니콜이 그 짧은 시간 동안 로버트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로버트를 적어도 자기 아이의 아버지로서 손색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로버트에게는 잠깐의 불장난이었던 사흘이, 완전히 잊혀졌던 사흘이, 니콜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사흘이었다. 매일 자기 아이를 보며 어떻게 '그' 사흘을 잊을 수 있겠는가? 소설 < 남자, 여자 그리고 아이 >는 뛰어난 대중소설이다. 철석같은 상호신뢰 속에서 살아온 부부 사이에 한 아이가 등장함으로써 생겨난 균열, 제 결혼을 파탄으로 몰고 갈 뻔한 낯선 아이에게 솟아나는 부정(父情), 프랑스로 되돌아가기 직전 아이가 복막염을 앓게 되면서 이뤄지는 가족적 화해가 시걸 특유의 경쾌한 문장에 실려 누선을 건드린다. 내 눈길은 이 멜로드라마적 스토리의 출발점이 된 여자, 니콜 게랭에게 멎는다. 결혼을 안 하는 까닭을 묻는 로버트에게 니콜은 이렇게 답한다. "나 자신도 내가 결혼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밖에 몰라요. 머리가 이상한 탓인진 모르겠지만, 나는 누구나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적어도 나한테는, 결혼이라는 것이 이득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혼자서 사는 것이 너무 편한 걸요. 혼자 있다고 해서 반드시 고독하지만은 않아요." 그런데도 아이는 갖고 싶다고 말하는 니콜에게, 로버트는 "그럼 혼자 기른다는 겁니까?"라고 묻는다. 니콜이 대답한다. "그렇죠." 매사추세츠에서 날아온 지극히 가정적인 남자 로버트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다. "그건… 꽤… 진보적인 삶의 방식이군요." 니콜이 로버트의 말에서 어떤 부정적 함축을 읽어내고 말을 잇는다. "상식 밖의 짓이라고 말씀하시고 싶은 거죠? 어찌됐든 저한테는 혼자 힘으로 어버이가 될 능력이 있거든요. 아이를 키울 능력이요. 또 세트는 반드시 상식적인 고장은 아닌 걸요." 사람들이 흔히 상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뒤집어버리는 것이 1968년 5월운동의 한 목표였다고들 한다. 작가 에릭 시걸은 니콜 게랭을 통해 자기가 이해하고 있는 바의 68년 5월을 슬쩍 내비친 것일까? 인습의 타파, 금지의 금지 같은 것들 말이다. 68년 5월에 파리만, 프랑스만 요란했던 것은 아니다.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가, 미국이, 일본이 반체체의 열기로 후끈했다. 그래서 일부 사학자들은 1968년을 1848년에 맞먹는 세계혁명의 해라고 하지 않는가? 프랑스에서, 니콜 게랭을 포함한 반체제파가 드골을 즉시 몰아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존체제에 어떤 균열을 내는 듯 보였다. 그 당시 10대 말에서 20대였던 소위 68세대는 기성세대를 향한 불신을 통해서, 제도에 대한 의심을 통해서 거대한 의식혁명을 이뤄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전통적 가족관계에 금이 가고, 질서라는 것에 대한 경멸이 커진 것은 68년 5월 이후였다. ' 싱글맘' 니콜 게랭은 그 68세대의 한 상징이다. 실제로 68세대는 앞세대에 견줘 프리섹스에 더 너그러웠고, 더 독립적이 되었고, 더 코스모폴리탄적이 되었다. 그들은 한동안 잊혀졌던 '세계시민'이라는 말을 제 몸으로 구현하려 애썼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때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68년이 그렇게 위대한 해였는지 잘 모르겠다. 1848년이든 1968년이든, 이 해를 세계혁명의 해로 추어올리는 역사학자 집단들을 비웃는 저널리스트나 테크노크라트 집단도 있다. 세계는 과연 1968년 앞뒤로 크게 달라졌는가? 이를테면 몇몇 좌파학자들이 주장하듯, 미국을 비롯한 세계 자본가들은 이 운동에서 위협을 느꼈는가? 미국은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날까 봐 두려워했는가? 10여 년 전 비밀이 해제된 미국 국무성의 한 보고서는 사실이 그렇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프랑스 각처에서 암약하고 있던 미국 정보원들이 주 프랑스 미국대사관을 통해 국무성에 건넨 보고에 따르면, 미국은, 정부든 자본가든, 프랑스를 전혀 염려하지 않았다. 전국 규모의 폭동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 결코 혁명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게 이들 현장 스파이들의 보고였다. 그 보고서는 오히려 당시의 프랑스를 유쾌하게 묘사하고 있다. 늘 뻣뻣하게 미국에 대들던 드골이 안절부절못하며 당황하고 있는 꼴을 보니 신나더라는 것이다. 미국 정보원이 보기에, 우리들의 니콜 게랭은 하나의 동화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또 어떤가? 68년 5월과는 상관없이 가족은 진화하고 있다. 그 진화의 내용은 유연화다. 이제 '결손가정'이라는 말은 점차 사라질 테다. 21세기의 어느 시점엔,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존재할 것이다. 니콜 게랭은 그 가운데 한 형태의 가족만들기를 실천해 보였다. 문득, 세트의 지중해 물살이 그립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13> 측천무후(則天武后)
한국일보 | 입력 2009.04.
"누구도 도전하지 말라" 후궁에서 황제가 된 철의 여인 역사 이래 정치는 남자들의 몫이었다. 어느 사회에서고 정치적 우두머리는 거의 남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 아래서 정치를 집행하는 이들도 죄다 남자였다. 여자들은, 정치적으로 힘센 남자들과 이불을 함께 씀으로써, 또는 혈연관계를 통해, 간접적으로 정치에 영향을 끼쳤을 뿐이다. 이렇게 정치가 남자의 일이었던 것은 그것이 힘과 힘이 날것으로 맞부딪치는 전쟁과 깊은 관련을 지녔다는 데에도 기인할지 모른다.

↑ 중국 왕실 화가가 그린 측천무후의 초상. 작자와 연대는 미상이다.
물론 우리는 역사상 몇몇 예외를 알고 있다. 즉 정치계급의 우두머리가 여자였던 경우를 알고 있다. 신라에는 선덕, 진덕, 진성이라는 여성 군주가 있었다. 고대 일본에도 히미코(卑彌呼), 스이코(推古), 사이메이(齊明)라는 여성군주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는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의 여성 군주가 여럿 있었던 모양이다. 카이사르와의 연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의 결혼으로 유명한 클레오파트라는 클레오파트라7세다. 군주가 되는 데 때로 성(性)보다 핏줄이나 종교가 더 중요했던 중세 이래 유럽에서도 적잖은 여성군주가 나왔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는 잉글랜드 제해권(制海權)의 초석을 놓은 처녀 군주 엘리자베스1세일 것이다. 스코틀랜드를 포함한 영국사에는 엘리자베스1세말고도 여성 절대군주가 여럿 있었다. 그 가운데 몇몇은 메리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었는데, 열렬한 가톨릭 교도였던 잉글랜드의 메리1세(메리 튜더)는 무수한 신교도를 처형해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이 별명은 오늘날, 보드카에 토마토주스를 섞어 만든 칵테일 이름이 되었다. 여성 군주는 유럽 서단(西端)에만 아니라 동단(東端)에도 있었다. 러시아 표트르3세의 황후 예카테리나는 남편을 폐위시키고 제위에 올라 계몽전제군주로서의 허명을 얻었다. 중부유럽이라고 여성군주가 없었겠는가? 오스트리아제국 여제와 헝가리 왕국, 보헤미아왕국 여왕을 겸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18세기 유럽에서 가장 힘센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유럽 각국으로부터 군주로 인정받기 위해 오스트리아계승전쟁이라는 홍역을 치르긴 했으나, 그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남편 프란츠1세보다도 오히려 더 힘있는 군주였다. 그녀의 정치적 재능과 결기가 아니었으면, 그녀의 남편은 독일 제1제국 황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이나 한국, 영국의 역사에도 여러 명의 여성 군주가 있었는데 이들 나라보다 훨씬 오랜 역사를 지닌 중국에 단 한 명의 여성군주만 있었다는 게 이채롭다. 그녀가 당대(唐代)의 측천무후(則天武后ㆍ624~705)다. 측천무후라는 호칭이 여제가 아닌 황후로서의 지위를 나타내므로, 무측천(武則天)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는 견해도 많다(앞질러 말하자면, 그녀는 본디 당 고종ㆍ高宗의 황후였다). 무(武)는 그녀의 성이다. 여기선 전통적 호칭을 따라 측천무후라 부르련다. 측천무후는 중국사만이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두드러지게 강력한 군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황제로서만이 아니라, 황후로서, 섭정(攝政)으로서도 큰 권력을 휘둘렀다. 그 점에서 측천무후는,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이른바 '즐거운 잉글랜드'(Merry England)를 난숙의 단계로 이끈 엘리자베스1세의 선배였을 뿐만 아니라, 피렌테의 메디치가(家) 출신으로 16~17세기 한 시절 프랑스 궁정과 사회 전체를 쥐락펴락한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마리 드 메디시스, 청(淸) 말기 서태후(西太后)나 조선조 명종 때의 문정왕후 같은 여자들의 선배이기도 했다. 측천무후의 궁중생활은 당 태종(太宗)의 후궁으로 시작되었다. 649년 태종이 죽자 그녀는 황실의 관습에 따라 한 사찰로 출가(出家)했다가, 고종의 후궁으로 다시 궁에 들어왔다.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여자가 다시 그 아들의 후궁이 된 것이다. 무후는 고종과의 슬하에 4남2녀를 두었고, 결국 655년 왕황후(王皇后)를 내쫓고 황후가 되었다. 타고난 정치적 재능의 결과였다. 그 이후 당 황실은 온전히 무후에게 장악됐다. 그녀는 고종이 살아있을 때부터 실질적 최고 권력자 노릇을 하며 전실 자식을 황태자 자리에서 쫓아냈고, 제 자식들에게 차례로 그 자리를 주었다. 683년 고종이 죽고 무후의 셋째아들 이현(李顯)이 황제(중종ㆍ中宗)가 되었으나, 외척의 세가 커지는 듯하자 무후는 그 이듬해 중종을 폐위시키고 넷째 아들 이단(李旦)을 황제 자리(예종ㆍ睿宗)에 앉혔다. 무후의 독단에 반대해 전국에서 여러 차례 반란이 일어났지만, 그녀는 이를 모두 진압하고 제 아들 예종마저 폐위시킨 뒤, 나라 이름을 주(周)로 바꾸어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이 주나라를 고대의 주(周ㆍBC 1046~771)와 구분해 무주(武周)라 부른다. 당이 신라를 도와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것은 고종 치세 때였지만, 이때도 이미 대외정책을 포함한 정사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것은 무후였다. 이렇듯 무후는 정치가의 첫 번째 자질인 강한 권력욕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정적에게 무자비했고, 제 피붙이라도 권력에 도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후는 잉글랜드의 '블러디 메리'나 프랑스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만큼은 피비린내를 좋아하지 않았다(카트린 드 메디시스 역시 메리1세처럼 신교도 학살, 1572년 8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조장했다). 과거제도와 행정체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민생에 눈길을 주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는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1세와 더 닮았다. 역사가들도 이를 인정해, 그의 치세를 태종이 다스리던 '정관(貞觀)의 치(治)'에 버금가는 '무주(武周)의 치(治)'라 부른다. 이 '무주의 치'는 당의 전성기라 평가받는 현종(玄宗)의 '개원(開元)의 치(治)'의 초석을 놓았다. 그러나 690년에서 705년까지 15년간 존속했던 무주(武周)는 버젓한 왕조라기보다 당(唐) 역사에 잠깐 끼어든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았다. 나이와 병고가 육신을 괴롭히면서 무후의 권위는 점차 퇴락했고, 그녀는 신하들의 뜻을 따라 태상황(太上皇)으로 물러나고 중종을 복위시켰다. 이와 함께 당 왕조도 부활했다. 오늘날, 측천무후의 후예라 일컬을 수 있는 여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측천무후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자신의 강한 성격뿐 아니라 그 시대의 왕조질서 덕분이기도 했을 텐데, (대의)민주주의가 널리 퍼져있는 오늘날을 그 시절과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대 유럽의 몇몇 여성군주들은 그저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힘있는 여성 최고권력자는 인도나 방글라데시 같은 남아시아 국가에서 나왔다. 아니, 유럽 중심국가의 하나인 영국에서도 마거릿 대처라는 힘있는 여성 최고지도자가 나오긴 했다. 그러나 정치적 최고지도자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그 사회에서 여성이 행사하는 정치적 힘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대처 시절의 영국이 그랬다. 외려 사회민주주의 전통을 오래 간직해온 북유럽 나라들에선, 최고권력자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여성의 정치적 진출이 활발하다. 남성의 육체적 힘이 여성보다 강하다 해서 남성이 정치활동을 독점하는 것은 인간 세상이 '동물의 왕국'이라는 뜻밖에 안 될 테다. 인류의 반이 여성이라면, 정치 영역의 절반이 여성에게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은 생물학의 원리를 거스르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화의 진전이라는 것은 그 한 측면이 생물학과의 싸움이다. 남녀 사이의 정치적 평등은 성적 평등의 집약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차지하는 경제적 힘에 비해, 아직 여성의 정치적 힘이 상대적으로 매우 작은 나라다. 최고지도자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그대로 여성의 정치적 힘으로 바뀌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것은, 북유럽국가들이 보여주었듯, 정치의 여성화와 남녀의 정치적 평등에 시동을 걸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힘센 나라 미국은, 여성이 그 나라 최고지도자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지난해에 보여주었다. 힐러리 클린턴의 민주당 경선 석패가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서운할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 세계 최고의 권력 자리에 그만큼 가까이 다가선 예는, 측천무후의 경우를 제쳐놓는다면, 그 때까지 없었다. 그것은 '그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한국의 경우, 격렬한 정치적 변동이 없다면, 차기 대통령으로 여성이 뽑힐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 그런데 그것이 좋은 일일까? 아니, 최소한 지금까지보다 덜 나쁜 일일까? 여성애호자인 나로서도,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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