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지퍼를 이해하는 법 [박남희]

초록여신 2009. 6. 5. 07:14

 

 

 

 

 

 

 

 

 

 

나는 단추세대지만 지퍼를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어린 시절 노는데 미쳐있던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단추를 잃어버렸다

단추는 나를 버리고 어디론가 물방개처럼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잃어버린 단추가

무척 궁금했지만 차츰 단추를 잊었다

 

 

그 후 어머니는 단추 대신 지퍼가 달린 바지를 사주셨다

지퍼른 기차 철로 같아서 금방 칙칙폭폭 무언가 소리치며

어디론가 달려갈 것만 같았다

내 젊은 밑천도 그 속에 갇히면 조용했다

그런데 나이 들면서 지퍼가 나를 부끄럽게 했다

지퍼는 내 사춘기를 가두고 나를 팽팽하게 심문했다

내 사춘기는 지퍼 밖의 세상이 그리웠지만

나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칙칙폭폭 봄이 가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지퍼는 내 나이를 가지런히 채우고 있었다

내 나이는 지퍼 속에 갇혀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지퍼 한쪽이 툭, 터졌다 그 속으로 어둑어둑 내 나이가 보였다

나는 갑자기 단추가 그리워졌다

단추가 드나들던 구멍이 더욱 다정하게 느껴졌다

 

 

지퍼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법은

단추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동안 내가 잃어버렸던 단추들이

지퍼의 어긋난 이빨들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것을 안 것은

지퍼가 아주 망가져 바지를 통째로 버린 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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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희

경기도 고양 출생.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폐차장 근처』『이불속의 쥐』등이 있다.

 

 

 

 

* 시에 2009년 여름호, 시와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