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광장을 지나며 [최영미]

초록여신 2009. 5. 21. 11:08

 

 

 

 

 

 

 

 

 

1981년 5월에 나는 순결한 하얀 운동화였다

독재자가 차려준 축제를 거부하려 학교를 뛰쳐나와

남학생과 어깨 걸고 행진하던 그날 이후, 나는 변했다

얼마나 많은 날들이 강물을 적시었나

정처없는 밤의 다리를 건너

쓸쓸한 도시의 창문들을 지나, 나는 늙었다

 

 

내 앞의 길들을 토막내며 나는 걷는다

스무 살

서른 살

마흔의 내가

도서관에, 광장에, 카페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는,

그녀는 오지 않는다

1985년에도 1995년에도 그리고 2008년에도

 

 

내가 달라질 다른 곳을 헤매지만

아침에 깨어나면 제자리.

과거에 갇힌 시멘트 벽이 아니라

앞이 보이지 않는 정글에 던져졌다면,

삶은 더 단순했으리

 

 

서투르게, 능숙하게 벗겨진

신발들을 나는 절반도 기억하지 못한다

 

 

 

 

 

* 도착하지 않은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