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내 눈빛을 꺼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 팔을 부러뜨려주소서, 나는 손으로 하듯
내 가슴으로 당신을 끌어안을 것입니다,
내 심장을 막아주소서, 그러면 나의 뇌가 고동칠 것입니다,
내 뇌에 불을 지르면, 나는 당신을
피에 실어 나르겠습니다.
- 루 살로메에게 헌정한 <기도시집>의 제2부에서(김재혁 역)
스치는 창살에 지쳐 그의 눈길은
이젠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다.
그 눈길엔 마치 수천의 창살만이 있고
그 뒤엔 아무런 세계도 없는 듯하다.
아주 조그만 원을 만들며 빙빙 도는,
사뿐한 듯 힘찬 발걸음의 부드러운 행보는
하나의 커다란 의지가 마비되어 있는
중심을 따라 도는 힘의 무도(舞蹈)와 같다.
가끔씩 눈동자의 장막이 소리 없이
걷히면 형상 하나 그리로 들어가,
사지의 긴장된 고요를 뚫고 들어가
심장에 이르면 존재하기를 그친다.
- 「표범—파리 식물원에서」 전문(김재혁 역)
릴케의 삶을 이야기하는 데 여인들과의 관계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여인들과의 관계를 일일이 거론하기는 힘들다. 그의 여인들이 릴케와의 관계를 고백한 회상록들만 해도 꽤 여러 종이다. 루 살로메는 물론이고, 피아니스트 마그다 폰 하팅베르크, 출판업자 카타리나 키펜베르크, 화가 루 알버트 라자르트 등이 회상록을 남겼다.
릴케의 여인들에 대한 볼프만 레프만의 분류는 재미있다. 그에 따르면 릴케의 여자는 항성과 유성 같은 혜성으로 나뉘는데 루 살로메, 카타리나 키펜베르크, 마리 탁시스 부인이 릴케의 생애 내내 사라지지 않은 항성이라면, 마그다 폰 하팅베르크, 루 알버트 라자르트, 화가 발라디네 클로소프스카는 잠깐 스쳐간 유성 같은 혜성에 해당한다. 릴케가 이렇게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은 것은 정신적인 연인 루 살로메가 수많은 남자들과 염문을 뿌렸던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당시의 분위기였던 면도 있다.
또 하나 슬픈 여인을 소개해야 한다. 릴케의 아내인 화가 클라라 베스트호프이다. 그들은 1901년 4월 28일 혼인했고, 같은 해 12월 12일 딸 루트를 낳았다. 이 무렵만 해도 릴케는 보헤미안적 생활을 버리고 한 곳에 정착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실제로 결혼생활 직후 릴케는 자신의 일에 매우 충실했다. 심지어는 방해받지 않고 글을 쓰기 위해 식사할 때는 창을 통해 들여온 음식을 서재에서 먹었다. 그러나 안정적인 생활을 구축하려던 릴케의 계획이 차츰 실패했다는 것이 확실해진 1902년부터 릴케와 처자식은 서로 만날 기회가 드물어졌다.
소설 <말테의 수기>도 릴케 문학의 완숙기에 창작된 중요한 작품이다. 덴마크 출신의 젊은 시인 말테가 파리에서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수기 형식으로 담은 이 소설은 릴케의 문학과 인생에 대한 고민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릴케가 순수 유미주의 미학보다는 샤를 보들레르나 구스타브 플로베르의 정신에 자극받아 ‘문둥이 옆에 눕는 것’, 현실 문제를 깊이 성찰하는 태도를 보인다. 무엇보다도 릴케 문학의 정점은 <두이노의 비가>(1923)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1923)이다. “내가 이렇게 소리친들, 천사의 계열 중 대체 그 누가/내 목소리를 들어줄까? 한 천사가 느닷없이/나를 가슴에 끌어안으면, 나보다 강한 그의/존재로 말미암아 나 스러지고 말텐데. 아름다움이란/우리가 간신히 견디어내는 무서움의 시작일 뿐이므로”(김재혁 역)라고 시작되는 첫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는 비장한 목소리의 파도 속에 휩싸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마리 탁시스 후작 부인이 제공한 ‘두이노 성’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쓴 이 시는 당시 교류했던 폴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에 비견될 만한 ‘생의 약동’에 대한 웅대한 찬양가이다. 무용수 베라 오우카마 크노프를 위해 쓴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는 진정한 사랑의 노래로서 시인 릴케의 꿈을 보여주는 시이다. 시인은 스스로 오르페우스가 되어 에우리디케가 된 크노프를 향한 구원의 노래를 부른다. 삶에 발을 둔 지하 세계의 방문객이었던 오르페우스, 저승의 신 하데스도 감동시킨 그의 노래야말로 시인의 꿈이었음을 보여주는 시라고 하겠다.
시인의 운명은 생각보다 일찍 저물었다. 릴케는 1923년 발병하여 몸져눕게 된다. 그때 이미 백혈병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흔히 릴케가 장미 가시에 찔려 패혈증으로 죽었다고들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장미 가시에 찔린 적은 있었다. 1926년 9월 릴케의 여행을 도와줄 이집트 여인 니메트 엘루이가 찾아왔을 때 그녀를 위해 장미를 몇 송이 따주다가 그만 장미 가시에 손가락을 다친 것이었다. 백혈병 때문에 상처가 쉬 아물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죽음의 원인이 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1926년 12월 29일 새벽,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죽음의 원인은 백혈병이었다. 이듬해 1월 2일 키펜베르크 부부, 레기나 울만, 난니 분덜리 폴카르트, 베르너 라인하르트, 루 알버트 라자르트, 그리고 몇몇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라롱의 교회묘지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릴케의 유언에 따라 다음 시구가 새겨졌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기쁨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이여.
(김주연 역)
볼 프강 레프만의 <릴케—영혼의 모험가>(김재혁 옮김, 책세상, 1997)는 심혈을 기울여 쓴 평전이다. 릴케의 전기나 평전은 이 책 말고도 몇 종 더 있지만,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것으로는 단연 최고이다. 이 평전을 통해 우리는 릴케야말로 뼛속까지 시인이
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꿈틀대는 것을 그대로 살아내려 한 시인이었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일반적인 도덕관념에는 맞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릴케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장미처럼 아름다웠지만, 가시를 가지고 있는 삶, 그늘을 드리울 수밖에 없는 예술가의 꿈이 릴케의 시만큼이나 절절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온몸으로 시를 쓴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의 <하얀 길 위의 릴케>(김상영 옮김, 모티브, 2003)는 릴케 평생의 정신적 연인 루 살로메가 쓴 릴케에 대한 회고록이다. 생각보다 냉정하고 담담하다. 하기야 릴케의 이중성(모순성)에 대해 루 살로메만큼 적나라하게 알고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때로 고매한 사람이었고, 때로는 그저 침묵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두 가지 모습에 대해 이름을 각각 정해주었다. ‘라이너’와 ‘또 다른 라이너’, 그가 이 이름들에 대해 분노를 표현했을 때, 나는 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릴케는 자신에게 ‘냉소적인 자아’가 있다는 생각에 분노하곤 했다. 장미의 가시가 그 냉소적인 자아를 상징한다면 적절할는지? 루 알버트 라자르트의 <내가 사랑한 시인 내가 사랑한 릴케>(하늘연못, 1998)는 릴케의 또 다른 연인이 쓴 회고록이다. 이 회고록은 루 살로메의 것에 비해 릴케를 추억하는 여인의 숨결이 훨씬 가깝게 들린다. 이 여인을 통해 느껴보는 릴케의 육체가 자못 생생하다. “그 무엇에 의해서도 중단되지 않은 길고 긴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우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밤의 한 부분이 완전히 지워진 것을 알고 놀라는 때도 많았다”라는 그녀의 고백을 들으면서 간간이 릴케의 시 한 편씩을 감상해보라. 우리들의 밤은 생각보다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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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Bach - Allemanda from Violin Partita No. 2 in D mino...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