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시인 70인

나는 네가 [박상순]

초록여신 2009. 4. 17. 13:57

 

 

 

 

 

 

 

 

 

 

나는 네가 시냇물을 보면서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냇물이 흐르다가 여기까지 넘쳐 와도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목련나무 앞에서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흰 목련 꽃잎들이 우르르 떨어져도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밤 고양이를 만나도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밤 고양이가 네 발목을 물어도 그냥 그대로 서 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꿈꾸지 않았으면 좋겠다. 창밖의 봄볕 때문에

잠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꿈속에서 영롱한 바닷속을

헤엄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인공 딸기향이 가득 든 고무지우개면 좋겠다.

인공 딸기향을 넣은 딱딱한 고무로 만든

그런 치마만 삼백육십육일 입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오래도록 우울하면 좋겠다

아무도 치료할 수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나는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네가 아무것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 세상에도 없었으면 좋겠다. 그 대신 너를 닮은

물렁물렁한 시냇물, 우르르 떨어지는 큰 꽃잎들,

달빛 아래 늘어진 길고 긴 밤 고양이의 그림자,

꿈속의 바다. 그리고 고무지우개.

그런 것만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웃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이 세상에 네가 없을 때에도

나는 끝까지 살아남아 네 모든 것에 어찌할 수 없도록 얽매인

불행이라면 좋겠다.

 

 

 

 

* 현대문학 55주년 기념 연재(월,수, 금 연재) / 한국대표시인 70인-시, 사랑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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