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시인 70인
껍질의 사랑 [최문자]
초록여신
2009. 4. 1. 10:02
사랑에 빠질 때
껍질이 있는 건 축복이죠
누구나 이 축복을 까보고 싶어하죠
찢고 비틀고 지치고 쪼개고 후벼 파면서 무섭게 사랑을 까보죠
껍질이 벗겨진 사랑은 죽어 있죠
하얗고 까맣고 누렇게 죽어 있죠
껍질이 깨지면 허망의 즙들이 흘러내리죠
축복이 사라진 것들을 사랑했죠
하얗게 눈을 뜨고 죽은 흰 쌀밥 같은
입을 딱딱 벌리고 죽은 조개들 같은
랍스터 등짝을 쪼개고 파낸 흰 속살 같은
껍질보다 주검을 더 사랑했죠
껍질들은 안으로 몸을 잔뜩 오므리고 있죠
팽팽하게 가슴 쪽으로 핏줄을 잡아당기죠
온몸을 끌어 덮으려다 찢어진 껍질이죠
조금씩 사라져가던 껍질이 축복일 줄 몰랐죠
껍질에 닿으려고 팔을 뻗어보지만
자꾸 헛손질하죠
사랑에 빠질 대
껍질이 남아 있는 건 축복이죠
이미 나에게도 새 뿌리가 나오고 있죠
조금씩 가슴이 찢어지고 있죠
* 현대문학 55주년 기념 연재(월, 수, 금 연재) / 한국대표시인 70인 -시, 사랑에 빠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