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 [황성희]
천리동 서울여관. 수배자들의 낯선 얼굴이 촘촘히 박힌 벽. 파란 셀로판지로 별을 만들어 붙인 안내실 창문. 둥글게 닳은 여자. 혼자세요? 갈라진 뒤꿈치로 운동화를 꺾어 신고 안내한 205호. 목욕탕도있어요. 크기가 짝짝이인 검은 슬리퍼. 휴지통 바닥 꾸덕꾸덕 말라붙은 휴지. 털이 엉켜 새까만 하수구. 더올사람진짜없죠? 문짝이 떨어져나간 장식장 위로 텔레비전. 둥근 여자는 선불을 받자 생긴건이래도잘잠겨요 돌아서 나갔지만. 손잡이는 부서져 있었다. 아득한 그 언젠가처럼.
전등갓 속 가무스름 갇혀 죽은 날벌레들. 내일을믿은게사실인가요. 벽지의 얼룩은 여전히 나비처럼. 누가먼저손을잡았죠? 옷장의 서랍은 위아래가 서로 어긋난 채. 그때거울속에서무슨소리를봤나요. 나는 분명 현재 속에 있었지만 우린한집에서같이썩기로했습니다 속삭이던 그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가방 속에는 온종일 쥐고 다니던 낡은 눈동자 한 쌍. 지겹게 울리는 전화기 속에서는 아무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이불을 들춰 바싹 마른 음모 몇 개를 털어낸다. 창밖으로 두런두런 녹지 못할 밤이 점점 내려 쌓인다. 얼굴 어딘가에서 물기가 번져나온다. 잔인한 설득처럼 시계는 멈추지 않고 나는 나를 조금씩 다른 곳으로 흘려보내게 되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지나간 시간 속을 뒤지는 것 말고는.
* 현대문학 55주년 기념 연재(월, 수, 금 연재) / 한국대표시인 70인 -시, 사랑에 빠지다
2009. 03. 30.
.......
꼭 이런 부류의 인간들이 있었다.
정말 비겁한 족속들이다.
혁명을 위하여 사랑을 버리다.
웃기는 발상이다.
자신의 사랑조차 지키지 못하면서 조국의 혁명을 꿰할 수 있단 말인가?
저 찢어진 청춘을 어쩌란 말인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있는지 정말 보고 싶을 것이다.
살아가는 한 그 '혁명'이란 단어를 다시 꺼내지 않기를...
진정 혁명을 위해 사랑 앞에서도 떳떳하고 모든 것을 희생한 대다수의 정의파들을 욕되게 하지 말기를바란다.
사랑도 명예도 필요없다고 했던가?
명예 만을 위해 사랑을 헌신짝처럼 버린 족속들이 현재 떵떵, 거리고 살고 있음에 가슴 아프다.
지나간 시간 속에 찢어진 마음만이 실연의 과거성을 부각시킨다.
시인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했다.
어찌?
기억이 가물가물 할 수 있겠는가...
그저 껍질이 깨졌기에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리라.
(찢어진 누군가의 청춘 앞에서 열나다, 초록여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