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外界

[스크랩] 이기선의 또 다른 시들....

초록여신 2009. 3. 4. 16:00

삼십 대의 病歷

 

 

 

 

 

 대체로 비가 자주 내렸다 우산은 잘 펴지지 않았고 사랑은 나
를 찾아주지 않았다  인적 끊긴 밤길을  신파조로 걸었다  詩가
되지 않는 말들이 주머니에 넘쳤다  슬픔의 그림자만 휘청이게
하였을 뿐  달빛은 아무 보탬이 되지 않았다  맹세의 말들이 그
믐까지 이어졌다
  낮에는 그 공원 벤치에 앉아 낙엽을 헤아렸다  바람이 심하게
훼방을 놓았다  나는 성냥알을 다 긋고도  불을 붙이지 못해 낯
선 사람에게 말을  건네야 했다  담배를 거꾸로 물었다고  그가
일러주었다
  쓰고 싶지 않은 말들을 일기에 적었다 뚜껑 열린 만년필은 금
세 말라버렸고 망설였던 흔적이 행간을 메웠다 두 눈을 부릅떴
지만 사랑은 보이지 않았다  앓을 만큼 앓아야  병이 낫던 시절
이었다

 

 

 

 

 

 

 

 

이기선

 

 

 

 

숲은 단단한 바위들의 냉정함을 보여 주어

나를 슬프게 했네

나뭇잎은 떨어진 자리에서 젖어만 갔네

바람이 불고 나면

이마의 땀 식은 자리는 쓸쓸하였네

잠시 걸음 멈춘 사이에도

햇살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가고

흐르지 않는 개울의 물 마른 자리가

상처처럼 보였네

아팠던 자리도 길이 될 수 있음을 숲에서 보았네

 

 

숲 하나를 지나니 또 숲이 나오네

 

 

숲은 단단한 바위들의 냉정함을 보이지만

바위를 들춰 보면 젖은 흙이 나오네

누구나 제 몫의 슬픔을 깔고 사네

깊어질수록 보이지 않는 遠視의 거리에서

숲은 다만 고요해질 뿐

 

 

옹달샘 숲 속의 고인 물가에 앉네

새들은 노래하고 나무들은 다정하네

오랜 시간이 흐르고 흘러

마지막으로 가라앉는 앙금들의 조용함을 듣네

 

 

 

 

 

 

 

 

길을 잃고
이기선

 

 

 

 

외등이 걸린다
어둠의 경계를 넘어서자
오래 기다린 길들이 흔들린다
길 하나가 흔들리자
불빛들 자욱하게 풀어진다
초록으로 불려야 늘씬한 계절의 하루이던
풀들은 말라 있다
서러웠던지 외로웠던지
강마른 내 하늘에도
그리움은 거덜나
바람도 목울대를 죽이고
가볍게 돌아서던 발걸음


 

 

가벼움은 삶의 엷은 아픔이라고
어둠에 몸을 적신 사람들은 말이 헤프다
술잔을 털어 적신 입술에서
내 이름이 마른다, 길 위에서
누가 꽃을 부르듯 나를
불러온 적 있던가
쓸쓸했으나 아득한 흉터에
사무쳐 살 바르는 네가 남았다

 

 

 

계절 한 잎 부리에 물고
떼지어 새들은 떠나간다,
깊을수록 속을 감추는 굽은 길 위
멀리서 돌아온 흐린 풍경이
밥상처럽 차려졌다

 

 

 

 

 

 

 

 

 

 

 

종이 접기

이기선

 

 

 

 

아이가 종이 접기를 하고 있다 한 번도 접힌 적이 없는 종이는 반듯하지만 무엇을 접으려 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생각이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일까 아이는 접었던 곳을 펼쳐서 다른 방향으로 접는다 짜증 한 번 부리는 일도 없이

접었다 폈다 하기를 벌써 몇 번씩이나 되풀이하고 있다

길을 잘못 들어섰던 적이 내게도 있었다 지우지 못하고 빠져나온 골목길, 그 발자국들이 지금도 나를 향해 걸어

오고 있다 무모할수록 사랑은 아름다워진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접을수록 종이는 구겨지고 접혔던 흔적들은 상처로 남는다 종이는 그것들을 몸에 지닌 채 학이나 나비가 될 것

이다

봄날 창틀, 방향을 정했는지 나비 한 마리 어디론가 날아간다 몇 번이나 자기 몸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잘못 접혔던 자국들이 날개를 이루는 무늬로 남았다

 


 

 

 

 

출처 : 시사랑
글쓴이 : heartbreak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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