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이기선의 또 다른 시들....
삼십 대의 病歷
대체로 비가 자주 내렸다 우산은 잘 펴지지 않았고 사랑은 나
를 찾아주지 않았다 인적 끊긴 밤길을 신파조로 걸었다 詩가
되지 않는 말들이 주머니에 넘쳤다 슬픔의 그림자만 휘청이게
하였을 뿐 달빛은 아무 보탬이 되지 않았다 맹세의 말들이 그
믐까지 이어졌다
낮에는 그 공원 벤치에 앉아 낙엽을 헤아렸다 바람이 심하게
훼방을 놓았다 나는 성냥알을 다 긋고도 불을 붙이지 못해 낯
선 사람에게 말을 건네야 했다 담배를 거꾸로 물었다고 그가
일러주었다
쓰고 싶지 않은 말들을 일기에 적었다 뚜껑 열린 만년필은 금
세 말라버렸고 망설였던 흔적이 행간을 메웠다 두 눈을 부릅떴
지만 사랑은 보이지 않았다 앓을 만큼 앓아야 병이 낫던 시절
이었다
숲
이기선
숲은 단단한 바위들의 냉정함을 보여 주어
나를 슬프게 했네
나뭇잎은 떨어진 자리에서 젖어만 갔네
바람이 불고 나면
이마의 땀 식은 자리는 쓸쓸하였네
잠시 걸음 멈춘 사이에도
햇살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가고
흐르지 않는 개울의 물 마른 자리가
상처처럼 보였네
아팠던 자리도 길이 될 수 있음을 숲에서 보았네
숲 하나를 지나니 또 숲이 나오네
숲은 단단한 바위들의 냉정함을 보이지만
바위를 들춰 보면 젖은 흙이 나오네
누구나 제 몫의 슬픔을 깔고 사네
깊어질수록 보이지 않는 遠視의 거리에서
숲은 다만 고요해질 뿐
옹달샘 숲 속의 고인 물가에 앉네
새들은 노래하고 나무들은 다정하네
오랜 시간이 흐르고 흘러
마지막으로 가라앉는 앙금들의 조용함을 듣네
길을 잃고
이기선
외등이 걸린다
어둠의 경계를 넘어서자
오래 기다린 길들이 흔들린다
길 하나가 흔들리자
불빛들 자욱하게 풀어진다
초록으로 불려야 늘씬한 계절의 하루이던
풀들은 말라 있다
서러웠던지 외로웠던지
강마른 내 하늘에도
그리움은 거덜나
바람도 목울대를 죽이고
가볍게 돌아서던 발걸음
가벼움은 삶의 엷은 아픔이라고
어둠에 몸을 적신 사람들은 말이 헤프다
술잔을 털어 적신 입술에서
내 이름이 마른다, 길 위에서
누가 꽃을 부르듯 나를
불러온 적 있던가
쓸쓸했으나 아득한 흉터에
사무쳐 살 바르는 네가 남았다
계절 한 잎 부리에 물고
떼지어 새들은 떠나간다,
깊을수록 속을 감추는 굽은 길 위
멀리서 돌아온 흐린 풍경이
밥상처럽 차려졌다
종이 접기
이기선
아이가 종이 접기를 하고 있다 한 번도 접힌 적이 없는 종이는 반듯하지만 무엇을 접으려 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생각이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일까 아이는 접었던 곳을 펼쳐서 다른 방향으로 접는다 짜증 한 번 부리는 일도 없이
접었다 폈다 하기를 벌써 몇 번씩이나 되풀이하고 있다
길을 잘못 들어섰던 적이 내게도 있었다 지우지 못하고 빠져나온 골목길, 그 발자국들이 지금도 나를 향해 걸어
오고 있다 무모할수록 사랑은 아름다워진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접을수록 종이는 구겨지고 접혔던 흔적들은 상처로 남는다 종이는 그것들을 몸에 지닌 채 학이나 나비가 될 것
이다
봄날 창틀, 방향을 정했는지 나비 한 마리 어디론가 날아간다 몇 번이나 자기 몸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잘못 접혔던 자국들이 날개를 이루는 무늬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