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뉴튼에게 경의를 표함 / 김남호
뉴튼에게 경의를 표함 / 김남호
벌레 먹은 사과 한 개 떨어진다
이제 온전히 벌레의 것이다.
누구에게도 사과할 필요는 없다
버러지 같은 놈들이 지구를 돌리고 있다
식육점 주인은 죽은 돼지의
불알과 쓸개를 나란히 내걸어 놓고
불알 없는 쓸개와 쓸개 없는 불알의
대차대조표를 만들고 있다
지구를 한 바퀴 다 돌리려면 아직도
삼겹살 열두 판은 더 구워야 한다
뭉텅뭉텅 썩은 사과를 낳은 여학생들이
산부인과에서 쏟아져 나온다
산후에는 돼지족발 같은 게 좋대요!
돼지족 같은 게 자꾸 치마 밑으로 발을 밀어 넣고 있어요
치마 밑으로 풋사과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뉴튼은 오늘도
저놈의 풋사과 때문에 잠들지 못한다
지구가 사과나무 아래서 오리걸음을 돌고 있다
―『현대시학』(2006년 6월호)
절대언어와 초현실주의적 상상력
내가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은 분명히 곤혹감이 아니라 통쾌감이었다. 김남호는 전통적 문법을 관자놀이에 핏발을 심은 채 유린하는 게 아니라, 유쾌한 잡담을 비눗방울처럼 날리며 해체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상상력이 빚은 편광층에 서식하는 벌레들은 그다지 낯설지 않다. 이상李箱이 1930년대 전반기의 한동안 개구지게 데리고 놀다 버린 자모子母를 빼다박았다. 그러나 이상의 그것이 포르말린내가 싸늘하고 창백한 실험실에서 수경재배水耕栽培한 은화식물隱花植物 같다는 인상을 준다면, 김남호의 그것은 빛에너지로 활발하게 번식하는 광합성光合成세균 같다는 느낌을 준다.
주註에서 밝혔지만 '뉴튼에게 경의를 표함'은 S.달리의 조각이다. 달리는 초현실주의의 지평을 새뜻한 채색으로 밝힌 화가다. (좀 다르게 분류를 해도, 나는 피카소의 그림보다 달리의 것을 훨씬 좋아한다. 무엇보다 피카소에게는 얻기 어려운 즐겁고 화려한 상상의 경험을 누리게 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초현실주의 시나 초현실주의 그림이나 갈래가 표시하는 것 이상으로 친연성이 짙다. 초현실주의 그림 한 폭의 콘텐츠를 언어로 묘사하면 그대로 초현실주의 시가 된다. 마찬가지로 초현실주의 시에 묘사된 것들에 선과 빛을 입히면 말짱 초현실주의 그림이 된다. 이는 아주 손쉽기도 하고 꽤 어렵기도 하다. 이상이 수천 편의 시를 썼다는 고백도 그렇지만, 이상을 흉내낸 많은 시인들이 실패를 보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이런 류의 시에서는 부싯돌을 그었을 때처럼 명멸하는 이미지의 섬광으로 눈요기하거나, 고정관념의 멱을 따고 산뜻하게 패대기치는 말장난을 그냥 따라 읽고 즐기면 그만이다. 의미를 파헤치는 것은 실례다. 함께 실은 다른 것들에 비해 이 시는 무슨 시대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니, 풍속에 대한 야유니 하는 뻔한 의미를 적출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런 류의 시를 낳게 한 환경에 대한 설명은 될지언정 시의 구문에 대한 설명은 될 수 없다. 만약 시인에게 그런 의도가 1그램이라도 들었다면, 이 시의 문맥은 사정없이 헝클어지고 순결성은 걷잡을 수 없이 짓밟혀진다. 그의 방법론은 더도 덜도 없이 말장난일 뿐이다. 이를테면 3연을 설명하기 위해서, 지구를 한 바퀴 돌리는 데 소요되는 시간 또는 일량과 삼겹살 열두 판을 굽는 데 드는 시간 또는 열량 사이의 방정식을 풀려 한다면, 그전에 이미 지구는 돌기를 멈추고 장렬하게 태양의 중력권 속으로 투신할 것이다. 또 뉴튼에게 경의를 표하든 사랑을 구걸하든, 아니면 뒤통수에 대고 뒷담화를 뱉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불알 없는 쓸개와 쓸개 없는 불알 사이에서 의미의 차이를 어떻게 도려낼 수 있겠는가. 나는 언젠가 김수영의 「풀」을 분석하면서 '절대언어'란 개념을 쓴 적이 있다. 드라마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한 채 소리 자체의 미적 효과에 충실한 음악을 절대음악이라 하는 것처럼, 의미나 상징을 완전히 휘발시키고 언어 자체가 순수하게 지니고 있는 재미에 복무하는 언어를 절대언어로 규정했다. 김남호의 언어도 절대언어에 가깝다.
김남호는 종횡하는 상상력의 맵시나 언어의 맥을 짚는 감도感度에서 신인이지만 신인답지 않은 노련함을 보인다. 그의 시가 시단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는 데 인색하게 굴 게 아니다. 그러나 이상이 불과 몇 년만에 전통적 기법의 시 쓰기로 전향한 현실에서 보듯이 초현실주의적 기법의 시는 원적적原籍的으로 오래 밀고 나가기 어렵다. 그러한 상상력은 종당 동어반복의 피곤한 회로에 빠질 수밖에 없다. 또 시인이 먼저 자기 상상력에 염증을 느끼게 되거나, 더 나쁜 경우라면 자기도 모르게 타성에 젖는 후안무치를 범하기 십상이다. 더구나 초현실주의적 상상력은 고정관념의 무장해제라는 쪽에서 의미를 지닐 수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 완제품으로서의 시를 기대하기 어렵다. (오태환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