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색깔의 이념과 이념의 색깔 / 김남호
색깔의 이념과 이념의 색깔
―박종국 시집 『하염없이 붉은 말』(천년의시작, 2007)
―문충성 시집 『백 년 동안 내리는 눈』(문학과지성사, 2007)
김 남 호
여기 두 사람의 젊은(?) 시인이 있다. 한 사람은 ‘지천명’에 등단하여 ‘이순’에 이르렀는데도 여전히 (아니 더욱더) ‘색(色)’을 밝히는 등단 십 년째의 젊은 시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보다 열 살이 많지만 이십 년 먼저 등단해서 삼십 년 동안 현실과 타협을 거부하며 결기를 돋우고 있는 젊은 시인이다.
앞의 젊은이는 박종국 시인이고, 뒤의 젊은이는 문충성 시인이다. 두 시인은 올해 초 앞 다투어 새 시집을 내놓았다. 박종국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하염없이 붉은 말』(천년의시작)과 문충성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백 년 동안 내리는 눈』(문학과지성사)이 바로 그것이다.
박종국 시인은 내륙(충북)에서, 문충성 시인은 섬(제주)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살아왔다. 그들의 시는 그들이 살아온 두 공간의 아득한 거리나 역사의 견고한 질곡만큼 거느리는 편차도 커서 하나의 주제로 뭉뚱그려 조감하기가 매우 어렵다. 교집합이 될 만한 요소가 별로 없다는 뜻이다. 그들의 시선이 입각하고 있는 지점도 매우 상이하다. 한 사람은 기억과 현상을 통해 존재의 본질에 이르려 하고, 한 사람은 역사와 일상을 통해 세계의 부조리에 맞서려 한다.
그러나 그 둘은 ‘녹색’이라는 하나의 색깔을 사이에 두고 잠시 만난다. 박종국 시인은 녹색을 통해 경계와 경계가 ‘밀치고 당기는’ 세계의 비의를 엿보고, 문충성 시인은 녹색을 통해 이념이 휩쓸고 간 자리의 ‘파르스름’한 녹(綠)을 본다. 그들이 만나는 지점도 색깔이지만 그들이 헤어지는 지점도 색깔이다. 이른바 ‘색깔의 이념’과 ‘이념의 색깔’이다.
1. 존재의 색깔들이 전하는 말:『하염없이 붉은 말』
어떤 형식으로든 색깔 없는 시가 있을까마는 박종국 시인만큼 철저하게 색깔에 집착하고 천착하는 시인은 드물 것이다. 그는 “색깔은 마음의 언어/다 표현할 수 없는 無窮”(「색깔」)이라고 정의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녹색은 “황색과 청색 밀치고 당기는/波狀운동”이자 “자신들을 넘어서려는 에너지”이며, “화해의 幻影”이고 “그렇게 보려고 하는/의식이 만들어낸 환상”(「녹색은 없다」)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육안이 식별해낸 색깔이란 고작 이웃하는 색깔들의 밀치고 당기는 불안한 경계일 뿐이고, 그렇게 믿고자 하는 주체의 의지에 다름 아니라는 뜻이다. 색깔은 대상을 규정하는 절대의 조건이 아니라 그 대상을 다른 것들과 변별하는 ‘마음의 언어’일 뿐이라는 ‘색의 고수’답게 그는 색깔을 눈이 아닌 귀로도 본다.
검정색을 만들 때는
모든 파장 받아들이는 大德
어머니 마음 들려주고
흰색은 모든 파장 반사하는
어린아이 눈동자 같은 마음 들려주고
파랑은 꿈 속 이야기
노랑은 나만의 행복한 마음
보라색은 고통을 견디는 방법을 들려줍니다
―「색깔은 말이다」부분
이처럼 색을 만들면서 시인은 “사람보다 사람같이 말하는/색깔들의 말을 듣”고 있다. 하기야 색깔이 언어라고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존재를 “색깔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물상들”에게는 모든 것이 색깔로 환원된다. 독기(毒氣)조차도 “기질이고 색깔이고 이름”(「썩혀도 썩혀도 썩지 않는」)이다. 심지어 “땀 냄새 물씬 나는” 노동조차도 그에게는 “색깔”이고 “경전”(「色經」)이다.
색에 관한 한 그의 새 시집은 유사품을 찾기 힘들 만큼 이채롭다는 유성호 교수의 평가는 결코 과장이거나 발문(跋文)의 수사가 아니다. 아주 독보적인 ‘색경(色經)’이다. 그는 철을 태우고 태워서 색을 만들고, 색의 종점인 검정을 넘어 아예 무색투명한 다이아몬드를 꿈꾼다.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일 테다. 그의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을 동시에 관통하고 있는 다음 시는 매우 상징적이다.
색깔 만드는 공장을 돌리며 나는
검정색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모든 재료를 태워야 한다
태워서 얻은 재를 농축해야 한다
철을 태워 검정색을 얻으려면
섭씨 1,200도 이상의 불로 태워야 한다
자칫, 잘못 열을 올려
섭씨 700도에 멈추면 노란색이 되고
섭씨 1,000도에 멈추면 적색이 된다
고온에 견디는 그릇도 있어야 한다
나는 한 번도 만들어보지 못했지만
이렇게 얻어지는 검은색 고밀도를 농축하면
가장 까만 검정색을 얻을 수 있고
가장 까만 색을 더 농축하면
까만 색깔의 몸을 잡고 있던 색깔을 놓아버린다
스스로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된다
가장 까만 색 끝에는 발광의 빛이 있다
검정색 만들기가 먹여 살리는 끝에는
무색투명한 내가 있어
고집불통, 나는 검정색을 만든다
―「검정색 만들기」전문
빨갱이와 파랭이의 이분법이 지배했던 우리의 현대사는 색깔로 생사를 가르는 ‘색깔의 제국’이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시인은 좌우의 이념과는 무관한 곳에서 색깔에 목매고 산다. 색깔 만드는 일이 생업이니 색깔은 그의 생명줄일 수밖에 없다.
먹고 살기 위해 색깔에 목매고 있기는 하지만 시인으로서 그의 삶이 가장 고양되는 지점은 알록달록한 채도(彩度)에 있는 게 아니다. 높고 외롭고 쓸쓸한 검정, 명도(明度)의 아득한 심연에 있을 터. 하여 ‘검정색 만들기가 먹여 살리는 끝’에 시인의 자리가 있다. 검정색이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검정색을 만드는 과정이 시인을 먹여 살리겠지만, ‘먹어야 사는’ 것들의 구차함 너머에 비로소 발광(發狂/發光)의 ‘내가’ 있다. 그는 색을 버리고 검정을 얻고자 하는 게 아니라 ‘검정색’도 버리고 영롱한 빛을 얻고자 한다. 즉 색 만드는 일의 궁극은 색 버리는 일이라는 이 ‘장자(莊子)적 진리’를 향해 고집불통, 그가 온몸으로 밀고 간다.
이 시가 그의 두 시집을 모두 관통한다고 한 건 비평적 수사가 아니다. 실제로 이 시는 그의 첫 시집 『집으로 가는 길』과 두 번째 시집 『하염없이 붉은 말』에 다 수록되어 있다. 얼핏 봐서는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약간의 수정을 가하긴 했지만 같은 시편을 두 시집에 반복해서 수록했다는 것은 시인이 이 시편을 매우 중요하게 취급한다는 증거다. 그만큼 이 시편은 그의 시세계가 어디를 지향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종요로운 시편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색깔에서 강한 의지를 느끼게 되는 이 시편보다 색깔에서 사람 냄새를 맡게 되는 다음 시편에 나는 더 주목한다. 색깔이 어떻게 온기를 지니게 되는지, 왜 색 만드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걸고 외곬으로 매달리는지, 시인은 다이아몬드보다 빛나는 자신의 ‘빨간 심장’을 꺼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그 답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색깔 만드느라
기름때가 줄줄 흐르는
알록달록한 얼굴들 바라보면서
안고 가야 할 생의 부피를 떠올렸고
먼지가 가득 낀 기계를 털어내면서
직원들과 그 가족 생각했다
기계는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야 하는데,
헛기침하다 뜨거워진 나는 어느새
기계를 돌리고 있었다
가난한 밥상이라도 차리기 위해
더운밥 찬밥 가리지 않고 있었다
당장, 풀어가야 할 삶이 있는
그곳에, 만들어야 할 색깔이 있었고
으스러지게 끌어안고 가야 할
심장, 빨갛게 뛰고 있었다
―「그곳에 있었다」전문
2. 색깔의 폐허 위로 내리는 눈:『백 년 동안 내리는 눈』
문충성 시인은 제주 토박이다. 1977년 등단한 이후 지금까지 삼십 년 동안 아홉 권의 시집을 상자할 만큼 열정적으로 작품을 쓰는 시인이고, 혼신의 힘으로 제주의 시공(時空)과 존재의 죽음을 돋을새김 하는 시인이다.
“4․3사태로/6․25전쟁으로 살아남기” 위해 “하늘까지 팔던 시절”을 넘기고, “좌․우익 이데올로기”(「괭이밥 宴歌」)를 넘어 제주의 현대사를 껴안고 왔으니 ‘제주’와 ‘죽음’이 그의 시의 밑그림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새 시집 『백 년 동안 내리는 눈』도 주제나 소재나 형식면에서 이전에 나왔던 시집들의 연장선에 있다. 시세계에 이렇다 할 가시적 변화나 시형식에 있어서 새로운 시도가 없었다는 뜻이다. 이런 그의 작품성향을 두고 그의 시가 발표한 양에 비해 다양한 변화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주제에 대한 일관성을 유지하며 열정적으로 작품을 쏟아내는 그의 창작스타일이야말로 시정신의 치열함과 시적 진정성에 충실함을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다양한 변화를 반영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시가 편협한 지역주의나 나태한 소재주의를 추수(追隨)하는 것은 아니다. 첫 시집부터 아홉 번째 시집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제주를 소재로 배경으로 삼긴 했으나, 그에게 제주는 ‘중앙’에 대한 대척점으로서의 ‘지방’이 아니라 ‘세계’의 다른 이름이다. 그는 제주라는 공간을 통해 세상을 보고, 제주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이해하고, 제주의 변화를 통해 시세의 풍랑을 예견한다. 제주는 삶이 영위 되는 생활의 근거지라기보다 시인이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거나 세계를 비쳐보는 거울이다.
제주 섬
국제 자유도시 되자
다시
몰려든다
땅 사러
오가는 사람들
돈 벌러
세계 관광객들
돈 쓰러
까불며 다니는
자동차들
토박이들
팔다 남은 땅이나
팔아먹고
피똥 싸며
―「자본주의」부분
시인에게 제주는 더 이상 환상의 공간도 아니고, 관념의 공간도 아니다. 천혜의 자연경관을 앞세워 천박한 자본을 증식하는 자본주의의 최전선일 뿐이다. 그래서 그의 시선이 과거를 향할 때는 전율과 습기로, 현실을 향할 때는 냉소와 풍자로 일관한다. 현실을 향할 때의 어조는 가볍고 신랄하지만, 과거를 향할 때의 그것은 무겁고 비장하다. 현실에 대해서는 객관적이지만 과거의 기억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왜 그는 과거의 기억에 대해 그렇게 연민하고 집착하는가?
어느 사석에서 제주 출신 문인이 농담 삼아 ‘제주사람들’을 이분법으로 분류한 적이 있다. 이를테면 기차를 타본 사람과 못 타본 사람, 학교를 제주에서만 다닌 ‘국내파’와 뭍에서 다닌 ‘유학파’ 등등. 그의 분류법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4․3사태’를 겪은 사람과 겪지 않은 사람!
충격적인 유년의 체험은 흉터로 역사화하지 못하고 아물지 않는 상처로 현재화하기 마련이다. 문충성 시인도 그렇다. 그의 기억 속에 떠다니는 ‘4․3사태’는 여전히 그에게 시적 자산이면서 부채다. 그때의 기억은 불쑥불쑥 도지는 속수무책의 지병이기도 하고, 현실과 타협하려는 그를 매섭게 다그치는 채찍이기도 하다. 그것은 아홉 권의 시집을 내게 하는 강력한 추동력이기도 하고, 그 아홉 권의 시집 중 어느 것을 골라서 펼쳐도 반드시 배어 있는 멍이자 녹(綠)이기도 하다.
이번 시집도 중반부를 넘기면서 기어이 그때 기억을 끌어오고야 만다. 어쩔 수 없이 <4․3>은 그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암호이고, 그의 시세계를 여는 강력한 주문(呪文)이다.
4․3때
관덕정 앞
나무 십자가 만들어 매달아놓은
이덕구 죽음
윗호주머니에
꽂혀 있던
숟가락
파르스름 녹슬어 있었다
어째서 우리에게
그 숟가락을 보여줬을까
―「숟가락에 대하여」부분
숟가락은 살아 있다는 기표다. ‘파르스름’ 녹슬어 있는 숟가락만큼 한 인간의 죽음을 명료하게 확인시켜주는 건 없다. 그런 점에서 숟가락은 그 존재의 등가물이다. 그런데 시인에게는 자기만의 숟가락이 없다. 부처의 곽시쌍부(槨示雙趺)처럼 이덕구가 ‘죽음’의 호주머니에 꽂아서 비주룩이 보여주며 진실을 증언했던 그 숟가락이 시인에게는 없다. 이미 죽어 귀신이 된 할머니 할아버지 숟가락도 따로 있는데 자신의 숟가락만 따로 없다. “싸구려 식당에 가도/고급레스토랑에 가도” “내 숟가락은 없다 천지간에” 어디에도 “불쌍한 내 숟가락”(「숟가락에 대하여」)은 없다. ‘숟가락이 없다’는 이 절규는 거대한 폭력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던 개별자의 도저한 자기부정에 다름 아니다.
우리 현대사에 악마의 주문처럼 내걸린 <4․3>, <6․25>, <5․16>, <5․18> 같은 이 숫자들의 조합은 그것을 거쳐 간 존재들에게 추호도 개별성의 ‘숟가락’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들이 허락한 것은 상처로서의 멍이고 죽음으로서의 녹(綠)일 뿐이다. 이 숫자들은 시간과 장소와 등장인물만 다를 뿐 ‘이념으로서의 색깔’이 폭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색깔의 횡포’가 수그러들었다고 해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떤 측면에서는 더욱 악화되었다. 끈질긴 이념의 색깔마저 일시에 덮어버린 미국식 자본주의라는 폭설은 제주를 덮쳤고, 제주는 “병든 개가 기어가듯” “전깃불 환한 길들이 묘지로 걸어가는”(「살아있는 묘지에서」) 유령의 도시가 되고 말았다.
“썩어가는 도시” “낮도깨비들 설치는 세상”(「낮은 목소리로」), “꽃들은 붙여준 이름대로 피고지지 않는”(「눈물 속을 빠져나오자」) 이 지상에서 시인은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다. “60년도 더 걸어왔”(「떠나야 할 길이」)지만 자신의 숟가락조차도 하나 없는 이 섬에서 이제 떠나갈 일만 남은 것이다.
아름다운 전설
몹쓸 바람에 휘말려
지상에서 사라져가는
날
쓸쓸하다
백 년 동안
눈 내리는
풍경 속
―「백 년 동안 내리는 눈」부분
아름다운 전설이 모두 사라진 폐허를 가로지르며 백기(白旗)처럼, 만장(輓章)처럼 눈이 내린다. 잠들 수도 깨어날 수도 없는, 아무것도 혁신할 수도 없는 ‘동학교도들’처럼 시인은 눈 속에 서 있다.
절망과 체념이 신화적 공간을 쓸쓸하게 채우고 있는 이 시는 시집의 표제시다. 하지만 표제시보다 내 시선을 더 끌어당겼던 시는 다음 시편이다. 현실에 밀착되지 못하고 부유하는 시인의 방황과 불안, 절망과 혼돈이 간결한 형식과 경쾌한 리듬에 실려 ‘별빛’처럼 빛나기 때문이다.
별빛입니까 밤물결 소리
저편으로
잦아드는
어둠입니까, 아하
그러니까
시방
나는
밤물결 소리 속에
있습니까 어둠 속에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별빛입니까
―「밤바다에서」전문
-계간 『시작』(2007.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