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세상의 모든 저녁 2 [유하]

초록여신 2009. 1. 2. 11:06

 

 

 

 

 

 

 

 

오후의 햇살, 고요의 솜털을 부비며 연못을 스칠 때

물결 위에 피었다 지는 알 수 없는 수런거림,

그리고 한 여인이 햇빛 한 올에 맺혀

숲길의 저쪽을 은은히 이끌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녀 실낱 같은 웃음은 소금쟁이처럼

걸어간 흔적도 없이 수련을 흔들고

눈망울엔 잠자리 망사 날개 같은 얄따란 무늬의 슬픔

 

 

그녀의 눈은 살아온 만큼의 잔잔한 연못을 꺼내

나를 비추어 주었습니다 언뜻

늙어 버린 낯선 내가 물풀로 어른거리다

미풍에 흩날리는 그녀 머리칼 끝에서

한참을 아프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우리는 제 그림자를 비추지 못하는 연못의 얼굴로

서로를 파문 그어 가듯 바라보며 걸어갔습니다

 

 

마지막 남은 햇빛이 발길을 서두르고

아주 작게 떨고 있는 그녀 가슴의 잎사귀

저녁 깊은 곳으로 익숙하게 머물 때까지

또 그렇게 걷고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 세상의 모든 저녁,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