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설렁탕과 로맨스 [정끝별]

초록여신 2008. 12. 2. 12:32

 

 

 

 

 

 

 

 

 

처음 본 남자는 창 밖의 비를 보고

처음 본 여자는 핸드폰의 메씨지를 보네

남자는 비를 보며 순식간에 여자를 보고

여자는 메씨지 너머 보이는 남자를 안 보네

물을 따른 남자는 물통을 밀어주고

파와 후추와 소금을 넣은 남자는 양념통을 밀어주네

마주 앉아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 허기

마주 앉아 한 번 더 마주 보는 허방

하루 만에 먹는 여자의 국물은 느려서 헐렁하고

한나절 만에 먹는 남자의 밥은 빨라서 썰렁하네

남자는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여자는 숟가락을 들고 늦도록 국물을 뜨네

깜빡 놓고 간 우산을 찾으러 온 남자는

여전한 여자를 처음처럼 한 번 더 보고

혼자 남아 숟가락을 들고 있는 여자는

가는 남자를 처음처럼 한 번도 안 보고

그렇게 한 번 본 여자의 밥값을 계산하고 사라지는 남자와

한 번도 안 본 남자의 얼굴을 계산대에서야 떠올려보는 여자가

 

 

단 한 번 보고 다시는 보지 못할 한평생과

단 한 번도 보지 못해 영원히 보지 못할 한평생이

추적처럼 내리네 만원의 합석 자리에

시월과 모래네와 설렁탕집에

 

 

 

 

* 와락, 창비.